2021년 8월 1일 / 성령강림 후 제 10주


나는 야곱입니다

(오바댜 1장 10-21절)


     오바댜서는 이스라엘의 형제라 할 수 있는 에돔 족속과의 관계와 그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으로, 에서는 야곱의 쌍둥이 형으로 아주 가까운 형제 관계입니다. 그런데 에돔이 유다를 배반합니다. 이스라엘을 돕지 않고 바벨론과 한 패가 되어 형제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이에 하나님은 오바댜 선지자를 통해 확실하게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말씀하십니다.

1. 하나님은 에돔의 죄악을 보셨습니다.


     성경 중 가장 짧은 말씀인 오바댜서는 총 21절로,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오바댜 선지자를 통해 에돔의 죄악을 보셨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들의 죄악은 교만이었고 자신의 형제 이스라엘에게 행한 포학이었습니다. 형제일지라도 그럴 수 있습니다. 가까운 관계라도 이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연약하고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모두 보고 계셨습니다. 에돔의 죄악을 지켜보고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도 살펴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죄악에 대한 값을 치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에돔의 죄악을 낱낱이 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인내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에 대해 오바댜를 통해 예언하십니다.
하나님은 에돔을 벌하겠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만국, 온 세상을 벌할 날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게 하시며 죄의 행위를 한 자들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셨습니다. 에돔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과 온 세상이 다 그 일에 예외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모든 이들이 구원을 받아야 하고 또 모든 이들이 심판에서 예외일 수 없다고 하시는 말씀이고, 구원 받은 이후의 삶에서도 믿음의 행위로 온전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래서 이미 구원 받았다고 해도 우리의 행위를 날마다 들여다보는 일은 중요합니다.

3.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께 속한 나라를 회복시키십니다.

     에돔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신 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 대한 회복을 예언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회복하게 하시고 나아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어 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전 우주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지난 호세아 설교 때에도, 누가 호세아이며 누가 고멜인가 심각하게 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에돔은 심판하시고, 야곱과 요셉은 살려 주시며 회복하신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우리는 야곱입니까? 에서입니까?
     야곱은 하나님의 자녀를 뜻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며 하나님의 상속자로 살게 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상속자가 되게 하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도 받게 하셨지만 고난도 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에서는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여 물어 봅시다. 나는 야곱입니까? 에서입니까? 영적으로 야곱이 되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더 구체적으로 물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나는 야곱의 후손, 아브라함의 후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021년 7월 25일 / 성령강림 후 제 9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아모스 5장 18~27절)


     성경에는 핵심 메시지가 있습니다. 두 단어로 집약한다면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냅니다. 오늘 아모스서 말씀으로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선택적 정의, 자기중심적 사랑을 진정한 의미의 공의와 사랑으로 이해하려는 요즘의 시대적 분위기와는 다른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 보려고 합니다.

1. 아모스 선지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아모스 선지자를 ‘정의의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남유다 사람이지만 북이스라엘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당시 북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들에게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어떻게 실행되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사랑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2.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전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이스라엘 주변 여덟 개의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 선포였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해서만 예언을 해도 될 텐데 굳이 주변국까지 심판을 예언하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온 우주를 심판하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대한 심판 예언과 함께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도 간과하지 않으실 것을 경고하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나라 백성인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남 유다의 율법을 멸시하고 지키지 않는 죄와 거짓에 미혹되는 죄를 지적하시고, 북 이스라엘의 불의와 불공정을 죄로 지적하십니다. 보호받아야 할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필 의무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공의였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고, 북이스라엘의 권력층들이 사회적으로 죄악을 저지르고 종교적으로도 불의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신랄하게 그들의 행위에 대해 심판을 예언하게 하십니다.

     세 번째, 이들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적으로도 부패하고 불의한 것을 지적하시며 심판을 예언하시고 경고하셨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제물과 십일조, 감사 제물을 드려도 하나님은 안 받으시겠다며 종교적 행위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을 제대로 찾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버린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는 받지도 않을 것이고 또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흐르지 않으면 아무리 예배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받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3.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살아갑니다. 두 세계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고도 잘 살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다른 이들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물질과 시간을 쓰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물처럼 강처럼 흐르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지금도 공의와 정의의 강이 흘러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흐르고 흘러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7월 18일 / 성령강림 후 제 8주


내게로 돌아오라

(요엘 2장 12~17절)


     제자를 세우는 일은 교회의 사명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제자로 세워져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야 합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며, 이루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요엘 2장 말씀으로 그 답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십니다. 핵심은 ‘여호와께로 돌아오라’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가던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로, 마음이 향하는 방향을 말합니다. 장소가 아니라 방향이지요.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는 ‘이제라도’ 돌아오라고 하시면서 심판의 날,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지금이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돌아오는 것은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에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의 본래의 뜻이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방향을 가던 길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방향을 트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길이 생명의 길이요. 예수님을 만나서 삶을 찾는 길입니다.

2. 하나님께 돌아오는 ‘회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정한 회개는, 다른 이들과 상관이 없습니다. 다른 이들이 어떤 죄를 지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죄인인지가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통감하고 예민하게 자신의 죄성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할수록 진정한 회개가 가능해 집니다. 진정한 회개로 평강과 풍성과 자유의 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3. 공동체의 회개까지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구약성경은 공동체의 결단과 함께 예배를 회복하는 일에 집중하며 공동체로 마무리되어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공동체적 의미를 갖습니다. 구약의 아브라함은 한 개인이 아닌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의미하고, 모세도 출애굽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개인적인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결국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회개는 지극히 개인적인 깊은 애통에서 비롯되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함께 모여서 해야 하는 공동체적인 회개가 예배를 통해 이루어질 때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시고 일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이 공동체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가정과 사회, 나라와 세계 등 우리의 기도가 점점 그 넓이와 깊이를 더해 가야 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살 수 있다고 호소합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며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하나님을 향해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갇혀 계신 종교적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살려주시는 생명이시고 우리를 존재하게 하시는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궁극적으로 심판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때를 삽니다. 그래도 방향을 잃지 말고 힘을 냅시다.


2021년 7월 11일 / 성령강림 후 제 7주


나는 결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호세아 11장 1-11절)


     ‘멘탈리티(mentality)’는 사람의 태도나 사고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문제 상황을 대처하는 그 사람의 태도와 문제 상황을 해석하는 사고방식들이 멘탈리티를 드러냅니다. 건강하고 행복할 때는 상관없지만 스트레스 상황이 되면 멘탈리티에 따라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집니다. 그순간 어려운 문제 자체보다 그 문제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그 반응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모른다는 것이 또 문제입니다. 그 때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 사랑을 삶의 에너지로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 호세아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만나기 원합니다.

1. 고멜은 누구인가?


     호세아에 등장하는 ‘고멜’이라는 한 여인을 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고멜과 결혼하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십니다. 고멜은 음란한 여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에는 목적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알기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합니다.

     고멜은 가정을 이루어 정착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여인을 끝까지 용납하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고멜을 통해 당시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 바알을 섬기며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이스라엘 백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제 용서해 줄 테니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2. 그 사랑을 아는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크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는 줄도 모르는 고멜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도 이스라엘이나 고멜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에는 포기가 없습니다. 우리를 끝까지 붙들고 계십니다.

3. 그 사랑을 어떻게 받고 있는가?


     고멜은 남편 호세아의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고멜 같은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고 알고 있습니까?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을 믿고 산다고 하면서도 그 받은 사랑을 자주 잊고 삽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폄하할 수 없는 깊이와 너비와 높이와 길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떼어놓을 수 없게 하고, 영원으로 이끌며 생명을 주어 살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 사랑을 몰라 거절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우리 역시 고멜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받은 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받은 것을 알고 감사하며 누리고 있습니까? 여전히 잘 몰라서 하나님과 떨어져 헤매고 있습니까? 빨리 돌아 오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살려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 사랑, 이미 받았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7월 4일 / 성령강림 후 제 6주, 맥추감사주일


맥추절을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

(출애굽기 23장 14-19절)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이스라엘 3대 절기인 유월절(무교절)과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수장절)의 핵심에는 ‘감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때를 따라 절기를 지키도록 하시면서 감사의 예배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역할과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율법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가르치셨고, 이를 위해 지키도록 한 것이 절기입니다. 이 절기들을 오늘에 적용할 때에는 성경적 의미와 함께 현대적인 재해석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맥추감사절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런 중요한 절기들을 상기시키며 감사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감사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특히 맥추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1. 감사 훈련 : 절기를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첫 수확의 맥추감사절을 통해, 감사하며 사는 삶을 기억하게 하며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를 기억하며 절기를 지키므로 감사의 삶을 살도록 훈련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는 절기는 그 때 그 시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지키는 행위가 중요합니다. 그 행위는 하나님께 하는 예배 행위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지키라고 말합니다.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이제 그 수확물의 첫 것을 드리는 일을 하게 하므로,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고 훈련시키느라 매 해 반복합니다.
     감사 절기를 통해 우리도 삶에 대한 태도를 ‘감사’로 훈련할 수 있습니다. 저절로 감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감사를 훈련해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 삶에 큰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2. 감사 예물 : 수고하여 얻은 것 중 가장 좋을 것을 드립니다

     맥추감사절을 통해 우리는 절기를 지키며 감사 예물을 준비하는 예배자의 태도에 대해 배웁니다. 하나님께 감사 예물을 준비할 때, 우리가 수고하여 얻은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일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것을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첫 수확물 중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은 중요합니다. ‘가장 좋은 것’을 드린다는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수고하여 얻었다고 해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얻게 하신 수확물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도 중요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되면 우리가 드리는 제물도 기쁘신 제물이 됩니다. 드리는 사람과 함께 받으시는 것이 제물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제물로만 여기면 안 됩니다. 그 제물 안에 그 사람의 정성과 사랑과 존경이 들어가는 것으로 봅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에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최선을 다해 우리의 감사를 표현하는 태도를 배우게 되길 바랍니다.

3. 감사 나눔 :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감사 절기는 반복적으로 기억하고 지켜야 하는 절기이면서 어려운 이웃들을 기억하여 함께 즐거워하는 축제의 절기입니다.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으로 모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이웃들과 함께 서서 즐거운 감사 예배를 드리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함께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웃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 서서 하나님 앞에서 함께 즐거워하라는 뜻입니다.
     절기 예배는 매년 반복합니다. 내년 이 때가 되면 또 감사절을 지키자고 다짐할 것이며 권면할 것입니다. 감사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 앞에 서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시간이며, 감사를 받을 분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아는 자들의 잔치였고 예배였습니다. 우리도 이 감사 절기를 맞이하면서, 감사를 떠올리며 훈련하고 작정하고 반복하는 감사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맥추감사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훈련을 하게 하시며, 감사 예물을 통해 감사의 고백을 하기 원하시고, 감사 예배를 통해 이웃들과 감사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감사와 감격이 솟아나는 한 주간이 되시고 7월 한 달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6월 27일 / 성령강림 후 제 5주


내 안에 '삭개오' 있다

(누가복음 19:1-10)


     삭개오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보려고 제목을 “내 안에 삭개오 있다”라고 붙여 보았습니다. 누가복음에만 나와 있는 이 삭개오 이야기를 읽으면서 심리적으로, 관계적으로, 영적으로 우리 안에 ‘삭개오’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1. 예수께서 삭개오를 만나신 이유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말씀을 하신 후, 19장에서 부자 삭개오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예수님이 여리고를 반드시 지날 이유는 없었지만 여리고로 들어가십니다. 어쩌다 여리고에 가서 우연히 삭개오를 만난 것이 아니고, 여리고에 가면 ‘삭개오’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삭개오를 만나시는 예수님의 관심은 그가 얼마나 키가 작든,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 세리장이든 상관이 없이 오직 삭개오가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삭개오를 만나십니다.

2. 우리 안에도 ‘삭개오’가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별개의 존재로 ‘삭개오’를 만나기도 하지만,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삭개오’도 들여다 볼 수도 있습니다.

     1) 그 첫 번째 삭개오는,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탐욕’입니다.
     그는 부자 세리장으로 가난한 백성들을 괴롭혀서 자신의 부를 축적하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의 이름이 ‘의로운 사람’인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도 있는 이중적인 삶의 태도를 봅니다. 저런 나쁜 부자가 있나 싶지만 우리 안에도 삭개오가 있습니다. 더 많은 유익을 얻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탐욕이 있습니다.

     2) 두 번째 삭개오는, 우리 안에서 놀라운 영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영적 호기심입니다.
     삭개오는 예수께서 자신의 동네를 지나실 것이라는 소문을 듣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고 키가 작아 볼 수 없어 나무에 오릅니다. 삭개오가 만일 이런 영적 호기심을 갖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삭개오처럼 영적 호기심을 갖고 체면 차리지 말고 나무 위로 오르셔야 합니다.

     3) 세 번째 삭개오는, 영적 결단을 즉각적으로 하는 태도로서 삶에 구체적인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를 오르는 삭개오를 예수님께서 발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속히 내려오라고 하시니 삭개오도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신 후, 자신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스스로 결단과 고백을 합니다. 18장에 등장하는 부자 관리와는 대조를 이룹니다. 이런 결단과 고백은 우리의 삶의 변혁을 만들 만한 거대한 분을 만날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3.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집중하실 때, 수많은 군중도 함께 있었습니다. 이들은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판단하며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태도에는 전혀 관심 갖지 않으십니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고 결단하는 삭개오를 바라보시며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의 집에 예수님이 들어가시며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집에도 주님이 오시면 구원이 이릅니다. 삭개오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잃어버린 자’는 구원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구원받아야할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모신 후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 이렇게 변화된 삭개오가 각인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언제든지 예수님이 오시면 아멘하고 환영하고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2021년 6월 20일 / 성령강림 후 제 4주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

(누가복음 18:18-30)


     오늘 누가복음 본문의 이야기에 한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성경에서 관리들은 주로 예수님을 대적하거나 반대하던 사람들인데 뜻밖에도 이 관리는 예수님을 찾아와 무엇을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1. 그는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그는 아쉬운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회적 지위도 있고, 경제적인 부요함도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 예수님께 무엇을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라는 영적인 질문을 합니다. 그는 어떤 행위를 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물었습니다.

2. 예수님의 대답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그 관리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동문서답하십니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는 질문에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행위에 초점 맞춘 관리의 물음에, 예수님은 ‘네가 선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며 행위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선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얻고 싶은 영원한 생명은 무엇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임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고 나서 계명을 잘 지켰는지를 물으십니다. 이에 그 사람은 어려서부터 그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신 있게 고백합니다.

3. 예수님은 왜 이렇게 요구하셨을까요?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켰다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말씀하시며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요구하십니다. 이 말씀에 그는 근심하였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을 기대하고 예수님 앞에 왔으나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서 나눠주라는 말에 근심하고 결국 돌아갑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이렇게 요구하신 것은,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일이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면 하나님의 자녀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 행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명을 지키고 재산을 팔아 나눠주라고 하신 명령은 선한 행위를 강조한 말씀이 아닙니다. 영생에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그 마음은 자신의 재물에 가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 팔아서 나눠주라’고 하셨고 그렇게 할 수 없음도 아셨습니다.
     여기서 깨달음 하나를 얻습니다. 여러분에게 전부가 되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전부인 것처럼 지키고 있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부족한 한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거 다 팔아 나눠주고 나를 따를 수 있겠니?’ 오늘 이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왔지만, 재물은 그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전부였습니다. 결국 그 전부를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부름에 불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초점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대비시키는 말씀입니다. 나에게 전부인 그것을 놓고,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하고 사는 삶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겐 늘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더 가지려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는 욕심을 내려놓으십시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거든, 이제는 그것을 정리해야 할 때 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살펴보시고, 가장 가까운 공동체 내에서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전부이지만 하나님께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지를 하나님께 묻고 정리해 가는 한 주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6월 13일 / 성령강림 후 제 3주


묶인 것으로부터 자유하라

(누가복음 8:26-39)


     복음서를 읽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길을 찾은 사람들 이야기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내가 길을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살 길을 찾게 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많은 귀신들에게 사로 잡혀 자유가 없던 한 사람이 참된 자유를 얻고 회복되는 이야기입니다.

1. 그를 묶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가십니다. 유대지역을 떠나 이방인의 땅에 들어가셨는데 거기에서 귀신 들린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를 소유하고 있는 귀신들이 군대를 이룰 만큼 많았습니다. 자신이 원한 결과가 아니었지만 빠져 나올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묶여 있는’ 상태입니다.
     현대인들도 이와 비슷하게 내 의지와 상관 없이 묶여 있는 억압적인 환경, 지배적인 환경이 아주 많습니다. 힘으로 상징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요즘의 사람들을 억압하고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지금 억압하거나 묶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2. 그 묶은 것이 어떻게 풀어졌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그 귀신 들린 사람을 사로 잡고 있던 귀신들을 다 내쫓습니다. 그를 묶고 있던 것들이 모두 풀어졌습니다. 어떻게 풀어졌습니까? 귀신들에 의해 묶여 있던 한 사람이 스스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어서 집을 떠나 죽은 사람들이 묻힌 무덤 사이에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자 묶여 있던 것들이 그에게서 다 끊어졌습니다. 귀신들이 예수님 앞에 굴복한 이유는, 그들보다 예수님이 더 강하고 센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여러분을 묶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과거에 얻은 상처들이 여전히 여러분들의 삶을 묶고 있을 수도 있고, 현재의 삶을 지배적으로 이끄는 그 무엇이 여러분을 자유롭지 못하게 묶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성격과 환경도 우리를 묶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묶인 것은 어떻게 풀 수 있습니까? 그들보다 더 강력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풀 수 있습니다.

3. 묶은 것이 풀려야 전할 수 있습니다.


     그 묶은 것이 풀어져야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귀신들로 인해 자유롭지 못했던 이 사람이 예수님께서 풀어주시니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게도 귀신들을 내쫓으시는 장면을 직접 본 사람들과 이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문제도 고쳐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들을 떠나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큰 일에 대한 경외감보다 또다시 이런 일이 생겨 큰 손해를 볼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크신 계획을 보지 못하니 예수님도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고 그 곳을 떠나십니다.

     우리는 오늘, 귀신들에게 사로잡혀 묶여 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를 묶고 있는 것은 없는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풀어 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은 우리를 묶고 있는 것에서 우리를 풀어서 자유롭게 해주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말씀대로 진리는 우리를 반드시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여전한 코로나 상황, 다른 어떤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6월 6일 / 성령강림 후 제 2주


그의 사랑이 많음이라

(누가복음 7:36-50)


     성경에서는 한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거나 새로운 출발을 하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을 만나는 그 시간을 ‘카이로스’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오늘 이야기에서도 한 여인이 예수님을 통해 ‘카이로스’의 삶을 경험합니다. 그 시간 그 현장에 다른 많은 사람들도 함께 있었지만 모든 이들이 그 순간을 결정적인 시간으로 만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사람, 이름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은 여인만이 새 출발을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나게 되는 복을 누립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같은 현장에 있었지만 둘의 경험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 두 사람의 시선을 함께 비교해 봅니다.

1. 오늘 이야기의 배경 : 그곳에 예수께서 계셨다

     한 바리새인이 자신의 집으로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예수님도 그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그의 초청이 예수님께 호의적인 태도였는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거나 존경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초대 받지 않은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 동네에서 ‘죄지은 여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으로 예수님이 그 바리새인의 집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용기를 내 찾아왔습니다. 이 여인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로 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이 장면을 바리새인 시몬이 지켜보며 예수가 선지자라면 이 여인이 죄인인 것을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속마음을 예수님께 들키게 됩니다.

2. 같은 장소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 : 바리새인과 여인

     바리새인 시몬과 여인이 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각각 다른 의미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과 여인의 시선, 바리새인 시몬과 여인의 태도는 서로 달랐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초청은 했지만 그 시선은 다른 데 있었고, 여인은 예수님께로 고정합니다. 시몬은 곁에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무시했지만, 여인은 예수님 뒤에 가서 가만히 발에 입 맞추고 그 발아래에 엎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시몬의 마음과 여인의 마음을 모두 읽으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몬에게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시몬 자신도 죄인이어서 다른 죄인을 정죄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며 모두가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3. 하나님의 은혜 : 자신의 죄를 영적으로 보는 일에 비례한다.


     핵심은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에 들어 있습니다. 비유에서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와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모두 주인에게 탕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누가 더 감사하겠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고 묻습니다.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더 많이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이 맞다고 하시며 여인은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 같은 사람으로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여인의 죄를 정죄하면서도 자신의 죄는 들여다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지를 잘 알아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죄의 비참함의 깊이를 알면 알수록 회개하면 할수록 더 큰 은혜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자신의 죄를 영적으로 얼마나 들여다 볼 수 있는지 그 깊이에 비례합니다.

     오늘 우리는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아 가신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만나러 온 한 여인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1) 우리 삶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실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곳에 계신가 물어야 합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결정적 순간은 세상에 속한 일일 뿐입니다.
     2) 매일 매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우리 삶을 흘러가는 시간에 두지 말고 주님이 일하시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아야 합니다.
     3) 완벽하지 않은 우리의 삶,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날마다 우리 자신의 깊은 곳까지 들여다 더 많이 회개하고 더 많이 사랑받으시길 바랍니다.


2021년 5월 30일 / 성령강림 후 제 1주


이만한 믿음 (such great faith)

(누가복음 7:1~10)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부하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백부장은 당시 로마 치하의 이스라엘에서 로마군 100명을 부하로 거느린 중요한 지휘관입니다. 권력도 있었습니다. 그런 백부장이 부하의 병 때문에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는 이방인이면서 유대인을 사랑했고 회당까지 지어 줄 정도로 관대했던 훌륭한 지휘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백부장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십니다. 그의 믿음이 어떻길래 예수님이 칭찬을 하셨을까? 오늘 본문을 통해 두 가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1. 믿음은 ‘무엇을 듣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합니다.(롬10:17) 듣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씀이면서 ‘무엇을 듣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듣는 내용은 그리스도의 말씀이고, 구체적으로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것보다 어떤 일을 하셨고 나에게 어떤 일을 해 주실 수 있는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백성에게 말씀을 들려주십니다.(1절) 유대인 장로들이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3절) 그리고 예수님이 백부장이 한 이야기를 듣고 놀라시면서 칭찬을 하십니다.(9절) 이 부분에서 서로 ‘듣는 것이 다르다’는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들은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아닌 예수님이 행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듣고, 누구를 듣고 있습니까? 우리 믿음은 어디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어떤 존재를 믿고 있는 것입니까? 그 존재가 우리에게 베풀 기적을, 또는 선물을 기대하며 믿는 것은 아닙니까?

2. 믿음은 ‘누구에게 순종할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은 누구에게 순종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급히 친구들을 보냅니다. 그 친구들이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백부장의 말을 그대로 전합니다. 그의 지위나 능력이나 권력으로는 이럴 수 없음에도 그는 예수님 앞에 완전히 엎드려 복종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낮추며 자신이 종에게 명령하면 종들이 순종하는 것처럼, 자신도 예수님이 말씀으로 명령하시면 그대로 하겠다고 합니다. 이 믿음이 ‘주님께 순복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백부장의 말을 듣고 감탄하시고 탄복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감탄할 만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집중하라는 말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그분의 존재 아래에 겸손히 무릎을 꿇으라는 뜻입니다. 나를 굴복하게 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의 주님이시고, 주님께만 순종하겠습니다. 이것이 백부장의 믿음이었습니다. 권력자이면서도 예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로 자신을 완전히 낮추어 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은 그가 누구에게 순종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의 믿음은 누구에게 순종하는 믿음인가?’를 묻게 됩니다.

3.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우며 무엇을 구해야 하며 어떻게 살면 되는 것입니까?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하실 정도의 칭찬을 받은 백부장처럼, 그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구해야 하지만, 지금의 우리 삶에 직접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문장으로 이렇습니다. ‘주님을 찾으라 그리고 그에게 순종하라! 주님을 만나라 그리고 그에게 순복하라!’ 이 일은 매일 매 순간 매시간 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진짜 기적은 주님의 존재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는, 기도할 때, 예배할 때, 우리 주 예수님만 구하면 됩니다.

     주님, 제게 필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만 구합니다. 주님을 먼저 구합니다. 주님을 찾으면 다 찾은 것이요. 주님을 얻으면 다 얻는 것입니다.


2021년 5월 23일 / 성령강림절 & 웨슬리회심기념주일


기다리는 자에게 오셨다

(사도행전 2장 1-13절)


 

     그리스도인에게 성탄절과 부활절, 맥추절과 추수감사절은 중요한 절기입니다. 그리고 또 기억해야할 절기로 성령강림절이 있는데 바로 오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 주셨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 대신 죽으셨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복음을 알려 주시고, 예수님은 다시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시며 우리를 홀로 두시지 않으시고 영원히 함께 할 성령 하나님을 보내 주십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절기가 성령강림절입니다. 이 절기는 첫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둘째 성령께서 오셔서 믿는 자들이 함께 교회를 이루도록 이끄셨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성령강림절을 시작하며 우리가 기억할 몇 가지를 봅니다.

1. 성령강림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성령강림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기로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은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약속대로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대로 본다면, 성령께서는 홀연히 하늘에서부터 오셨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를 내셨고, 120명 넘게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 그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각자 자신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오신 성령은 무엇이고 누구인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성령은 어떤 에너지나 능력이나 힘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인격적인 존재라는 뜻은 우리와 소통을 하시며, 함께 하시며 이끄시고 가르치시고, 때로는 우리로 인해 애통해 하시기도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3. 성령이 임하면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하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그 첫 번째는 성령이 임한 제자들이 각기 다른 나라의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소위 ‘방언’이라고 하는 다른 언어들을 말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물론 성령충만의 결과에 ‘방언’이 필수적인 현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힘이 아닌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을 했다는 것이 더 중요한 핵심입니다.
     두 번째로 더 큰 역사는, 복음 전파의 능력이 드러나는 일입니다. 성령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싶어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마음을 쏟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사는 일,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4.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면 됩니까? ‘성령의 내주하심을 믿고 그 분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야 합니다.’ 구원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시고 우리 가운데 살게 되시니 우리는 이제 그분의 인격과 능력을 힘입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아가 얼마나 강한지 여전히 우리 마음대로 합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까지 조종하며 삽니다.

     어떻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을까요? 다른 것으로 충만한 게 아니라 하나님 그분으로 충만해야합니다. 그러면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약속대로 오신 성령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 계시며 영원히 우리를 떠나시지 않으십니다. 그 분이 인도하심을 날마다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5월 16일 / 부활절 제7주 & 청년주일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마가복음 9장 14-29절)


 

     산 위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신비한 일을 체험합니다. 반면 산 아래에서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산 위의 상황과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산 아래의 광경이 사뭇 다름을 봅니다.

     산 아래에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세 명의 제자들을 제외한 9명의 제자들이 남았습니다. 마침 아픈 아이를 데리고 온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간청하지만 제자들이 그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고 그 가운데 있던 서기관들이 제자들과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녔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고, 예수님이 하신 일도 직접 목격했고 체험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모릅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그들을 제자로 선택하시고 전도하러 내보내실 때부터 병을 고치는 치유 은사와 귀신을 내쫓는 은사를 주셨지만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이 크지 않아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아픈 아이를 데려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다면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달라며 다소 소극적으로 요청을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그의 절망과 아들을 향한 안타까움 그리고 사랑을 봅니다. 오랜 기간 앓으며 수많은 실패를 맛보았으니 조심스러운 것도 이해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잘 들여다보면, 치유의 이야기나 축귀와 축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너희는 믿음이 있느냐?’에 대한 물음입니다. 예수님이 아이의 아버지에게 물은 믿음은 무엇입니까?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다고 신뢰하는 믿음입니까? 이야기의 결론이 아이에게서 귀신이 나가고 깨끗하게 나았다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 믿음에 대해서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드러나는 어느 현상에 대한 믿음이 아닌, 대상에 대한 믿음이고, 그 대상으로 말미암아 일을 이루시는 것에 대한 믿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단순히 병이 낫고 귀신이 나가기를 바라는 기도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우리가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모든 상황을 바라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후 제자들이 예수님께 조용히 묻습니다. 왜 우리는 그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까? 예수님이 ‘기도 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하십니다. 믿음과 기도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믿음 없이는 기도할 수 없고, 믿음 없이 기도하는 것은 주문을 외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기대하는 사람만이 믿음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있는 사람만이 기도합니다. 기도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화하는 영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은혜의 방편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믿음이 있습니까? 믿음이 없는 이 세대 앞에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았고 내 삶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며, 이 세상도 하나님이 이끄심을 믿습니다’라는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믿음이 있어야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더욱이 믿음을 갖고 같이 기도해야 할 사람들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2021년 5월 9일 / 부활절 제6주 & 어버이주일


어버이 그 사랑

(마가복음 7장 24-30절)


 

     어버이 주일입니다. 마가복음 7장의 오늘 본문을 통해 함께 나눌 말씀이 초점은 좀 다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입니다. 귀신에 들린 딸이 있는 한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어머니는 딸을 고치기 위해 온갖 방법은 다 써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고, 딸을 고칠 수만 있다면 못할 일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보는 딸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1자녀를 위한 적극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 일행은 두로 지방으로 가셔서 다른 이들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쉬고 계실 때,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한 여인이 찾아옵니다. 이 여인은 헬라인에 수로보니게 족속인 이방 사람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립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이 여인의 적극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고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못할까 하는 부모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찾아와 무릎을 꿇은 이 여인을 보며 생각해봅니다. 다른 부모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다면 예수님께 어떤 소원을 말할까? 여러분은 어떤 소원이 있으십니까? 자라나고 있는 어린 아이들에게 바라고 계신 소망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자라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이 어머니의 적극적인 사랑을 보며, 아이들이 주님을 만나게 되는 일이야말로 한 아이가 인격적으로도 잘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2. 자녀를 위해 모욕까지 견딜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 올 때, 이 분을 만나서 내 딸을 반드시 고치겠다는 마음과 고쳐 주실 것이라 믿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무릎까지 꿇은 이 여인에게 야멸차게 말씀하십니다.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참아냅니다. 모멸감을 참아 내는 이유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딸을 고치겠다는 마음을 가진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딸이 건강할 수만 있다면 이 정도의 비난과 모욕은 견딜 수 있다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합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참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따가운 시선도 참을 수 있고, 인격적인 모독도 참아 낼 수 있습니다. 모멸감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위한 일이라면 목숨도 걸 수 있는 것이 부모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여인의 고백을 듣고 예수님이 그의 딸을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모진 말을 듣고도 간절히 자신의 소원을 드러내며 견뎌낼 수 있었던 그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보셨습니다. 직접 가셔서 딸을 보지 않으시고도 말씀으로 고치셨고,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때로부터 아이가 나았다고 전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옛날이야기로만 읽으면 안 됩니다. 딸을 향한 한 여인의 이야기로만 보시면 안 됩니다. 내 이야기,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살리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핍박하고 비난하고 모멸감을 주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 모든 비난과 핍박을 참아내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 아버지이신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자녀를 위해 어떤 모멸감도 감내할 수 있는 어머니처럼, 우리를 위해서라면 그 모든 모욕을 다 참아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어버이들이신 여러분, 또는 어버이가 되실 여러분. 부모님을 통해 받은 사랑을 너무 쉽게 잊고 삽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은 아예 떠올리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버이나 자녀들입니다만, 그 이전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 분의 자녀입니다. 오늘 이 여인의 딸을 향한 애틋한 사랑을 통해 우리의 부모님들의 사랑을 귀히 여김과 동시에, 우리를 향해 영원한 사랑을 보여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며 살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021년 5월 2일 / 부활절 제5주 & 어린이주일


하나님나라와 어린아이

(마가복음 10장 13-16절)


 

     5월의 첫 주일, 어린이주일입니다. 성경에 있는 절기는 아니지만 지키며 기억해야 할 주일입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아 마가복음 10장에 등장하는 짧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을 대하셨던 방식과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신 말씀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며, 어린아이들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 봅니다.

     오늘 말씀을 이런 질문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1.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예수님께 오게 되었습니까?
     어린아이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계신 현장으로 어른들에 의해 아이들이 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 기적 이야기를 들은 많은 어른들이 예수님이 만져 주시길 바라며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렇게 데려온 어른들과는 달리, 또다른 어른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어른들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까지도 귀찮아하며 꾸짖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어린아이들을 대하는 어른들의 모습과도 그리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해 어른들의 의사에 따라 움직여야 하지만 어린아이들도 모두 소중하게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을 데려 온 어른들과 그 어린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어른들 모두가 어린아이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2. 예수님께서 화를 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자 제자들이 꾸짖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태도에 예수님은 화를 내십니다. 자신들 중 누가 더 높은 사람인지 다투고 있던 제자들 가운데에 권력도 관심도 힘도 없는 한 아이를 세우시고는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말씀은 있는 그대로 귀히 여기며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데려온 어른들은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을 만져 주기만을 바랐지만 예수님은 어린아이들 한 사람씩을 안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어린아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 이야기를 꺼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말씀으로 이어갑니다. 어린아이들을 꾸짖는 제자들의 태도만 언급하셔도 될 것 같은데 하나님나라와 어린아이를 연관시킨 이유는, 어린아이를 통해 하나님나라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본질과 목적과 방향과 태도에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나라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나라입니다.
또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당대의 사고와 습관과 자신들의 삶을 뛰어넘지 못하고 어린아이들을 함부로 대하며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린아이 같아야 들어가는 나라는 하나님께 속해 하나님의 언어를 쓰는 나라입니다. 생명이 생명으로 존중되는 나라입니다. 여러분이 속한 나라는 어떻습니까? 어린아이 같은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여러분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하나님나라를 보여주고 계십니까?
     어린이 주일, 어린이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설교는 못했지만, 어린이들을 보고 만나고 키우신다면, 그들에게 하나님나라가 열려 있음을 기억하시고 귀히 여겨 그들을 닮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4월 24일 / 부활절 제4주


'에바다'되어야 산다

(마가복음 7장 31-37절)


 

     마가복음 말씀을 몇 주간 읽어가며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나누고 있습니다. 귀신을 쫓고 질병을 고친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계속 강조하는 것은 단순한 기적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적만 맛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아 삶의 변화까지 맛보는 경험을 말합니다.
     오늘도 치유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의 이방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오셔 한 사람을 만납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데리고 온 사람으로 청각 장애가 있었습니다. 또 듣지를 못하니 말도 못했습니다. 데리고 온 사람들은 예수님이 손으로 얹기만 해도 나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복잡하게 일을 하십니다. 데려온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신 다음, 예수님의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어 손으로 그의 혀에 갖다 대신 후,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고 ‘에바다’라고 외치십니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렸습니다.
     여기서 핵심 단어인 ‘에바다’를 기억해야 합니다. 원래 뜻은 ‘열려져라, 열려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에바다’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닫힌 것은 열리고 묶인 것이 풀렸습니다. 열려지는 일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기다렸던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소망이고 약속입니다. 예수께서 메시야로 오셨으니 그 일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에바다’라고 하시며 하늘을 보며 탄식을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지 못해 나온 탄식입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도 이렇게 예수님의 탄식이 흘러 나오는 삶을 살아갑니다. 왜 예수님이 탄식을 하셨을까? 이것은 못 듣고, 못 보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눈은 보라고 있고, 귀는 들으라고 있고, 입은 말하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 구원 받지 못하고 있으니 탄식해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신체적으로 시각이 살아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보는 게 아닙니다. ‘에바다’ 해야 볼 수 있습니다. ‘에바다’ 하지 않으며, ‘에바다’ 되지 않으면 여전히 어둠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렇게 다짐합니다.


     첫째, 우리의 듣는 것이 ‘에바다’ 되게 해야 합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에바다’ 하시는 것은 우리의 영적 상태까지 확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선포입니다. 요즘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니까? 그분의 하시는 일을 보십니까? 그렇다면 ‘에바다’ 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기적은 몸의 어느 한 곳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역입니다. 먼저 우리 귀가 ‘에바다’ 되어야 합니다. 열리지 않으면 듣지 못하고 듣지 못하면 살지 못합니다. 듣는 것이 열려야 말하는 것도, 구원의 삶도 열리게 됩니다. 우리의 듣는 영적인 귀가 온전히 열리게 되기를, ‘에바다’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우리의 신앙고백이 ‘에바다’되어야 합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백성을 구원하는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입니다. ‘에바다’는 어둠의 공포를 깨뜨려 빛의 삶으로 열어 줍니다.
     오늘 말씀에 이어지는 마가복음 8장에 먼저 배고픈 무리들을 먹이시는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은 먹어야 살기 때문에 빵을 먹이십니다. 이어서 벳새다에서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을 보게 하십니다. 먹이시고 보게 하신 후에는 빌립보 가이사랴 마을에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제자의 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마가복음 7장에서 8장까지 이어지는 말씀을 주목해 보면, 귀와 눈이 열리지 않으면 입도 열리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영적으로 귀와 눈, 그리고 입이 닫히면 우리 몸이 주님의 길을 좇아갈 수 없음을 가르쳐 줍니다. 제대로 ‘에바다’되어 입으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이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에바다’되어야 삶을 산다는 것을 적용해 보았습니다. ‘에바다’ 되셨습니까? 여러분의 귀가 하나님의 음성과 그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에바다’되셨습니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되면,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반드시 고백할 수 있습니다. 


2021년 4월 18일 / 부활절 제3주


어디까지 믿습니까?

(마가복음 5장 21-34절)


 

     ‘믿음이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는가?’, ‘믿음은 우리 삶에서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이 물음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믿음이 실재가 되고 있는가?”입니다. 믿음의 실재는 구원 받은 사람이 어떤 능력으로 사는가를 묻는 물음입니다.
오늘 말씀도 단순한 치유 사건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믿음이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말해주는 사건으로 봐야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믿음의 대상에 대한 질문인지 아니면 그 믿음의 대상이 하는 일에 대한 질문인지 차례로 물어 보겠습니다.

     오늘도 이 치유하심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1. 믿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12년 동안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본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 손만 닿아도 나을 것 같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앙적인 믿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치유를 바라는 사람의 믿음이고, 치유만 된다면 치유해주는 분이 누구든 상관이 없는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내용도 예수라는 분이 기적을 일으키니 그 곁에 가서 옷만 만져도 나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2. 어디까지 믿습니까?
     질병 때문에 주님을 찾는 이 여인을 보면서, 우리는 주님이 어디까지 하실 수 있다고 믿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질병 치유만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중에 우리 주님이 하실 치유를 기대하는 일은 그저 옷만 스쳐도 좋겠다는 이 여인만큼은 가져야 합니다.
     12년 동안 혈루 증을 앓고 있었던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 손만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고 믿으며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될 거야. 그렇게 할 거야” 이렇게 말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결국 그의 믿음의 생각이 기적의 결과를 낳습니다. 우리도 크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믿으면 어떤 결과를 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손을 대었던 것과는 달리 누군가에게 자신의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누가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고, 이 일을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어떤 의사도 치유하지 못했던 불치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여기에서의 ‘구원’은 질병의 치유가 영혼도 구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에 대한 선포는 주님이 하셨지만, 구원을 가능하게 한 믿음은 그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믿음의 결과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믿음의 결과는 구원을 이루게 합니다. 구원을 받고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삽니다. 그러는 중에 치유도 받고 주님과 동행하는 행복도 누리는 것, 이것이 곧 믿음의 결과입니다.

     누구를 믿으십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만드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음을 믿습니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믿습니다. 곧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어디까지 믿습니까?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기대하며 기도하며 주시는 뜻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믿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다 구원하시는 통전적 구원의 결과를 낳습니다.


2021년 4월 11일 / 부활절 제2주


치유사건을 통해 말씀하시다

(마가복음 2장 1-12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이 이야기가 유명한 것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 때문입니다. 갈릴리 지역 온 동네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돌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이때 한 중풍병자가 네 사람에게 실려 오지만 문 앞까지 가득 찬 많은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꼭 만나야 했기에 그들은 지붕을 뜯어 중풍병자를 침상에 달아 내리기로 작정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의 절실함과 믿음을 보시고 말씀을 하시는데 병이 나았다고 하지 않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집중하고 계신 부분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중풍병자의 병이 아닌 그의 구원에 집중하고 계십니다. 질병도 고쳐야 하지만 죄 사함을 받아야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시며 죄를 사할 수 있는 능력이 예수님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음서 곳곳에 예수님이 행하고 계신 기적의 사건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 사건들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배고픈 자를 먹이시는 등, 그 놀라운 일 자체를 보여 주시려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그때마다 질병의 치유에만 집중하지 않으시고 구원에 관하여 선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이 치유하심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첫 번째, 우리의 믿음이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중풍 병을 고치신 기적보다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진 예수님 당신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떡이 아니라 떡을 주신 주님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내용, 믿음의 본질, 믿음의 대상이 무엇이고 누구인지 되묻고 계십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께 왔다가 그들은 구원까지 받았습니다. 병만 고치면 되고 마음의 평안만 있으면 된다거나, 기도하면 응답 받으니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은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헛된 목표입니다. 모든 것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길은, 주님을 바라보는 길입니다. 이 삶을 우리는 주님께 의탁하며 연습해야 합니다.

     두 번째,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다시 일어서게 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라’고 하시는 주님의 명령에서 현재의 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치유 받기 위해 온 사람에게 예수님은 일어나라 들어라 걸어가라 선포하고 명령하십니다. 모두 구체적이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스스로 직접 해야 하는 행위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수많은 어려움들을 겪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과제 앞에 있습니다. 그때에도 먼저 주님을 바라보며 구원의 문제를 짚어 나가야 합니다. 그 문제 앞에서 일어나 나아가도록 선포하고 명령하며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은 태도를 결정하는 첫 시작이며 선포입니다. 우리가 입으로 구해야 하는 것, 선포해야 하는 것, 몸으로 적극 실천해야 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 이름의 권세에 달려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의 존재, 그 분의 능력, 그 분의 일하심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 이름에 힘입어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일어날 수 있고, 누웠던 우리의 자리를 들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021년 4월 4일 / 부활주일


부활 신앙으로 살라

(고린도전서 15장 12~19절)


 

     오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고난 받아 죽으신 후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가지고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그 의미가 과학적, 논리적으로 잘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다가 고난 당하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사건을 어떻게 그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만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성과 감정, 그리고 의지를 모두 동원하시며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열심히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사건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하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며,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래서 제목을 ‘부활 신앙으로 살라’ 이렇게 잡아 보았습니다. 부활 신앙으로 사는 삶이란, 도대체 어떤 삶이며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 권면일까요?


1. 부활 신앙의 삶은, 다시 사신 주님이 나의 주님이심을 확신하며 살게 합니다.


     신약 복음서에 수많은 기적의 사건이 등장하지만, 실제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힘을 주는 믿음은,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생깁니다. 예수님이 친히 세운 12명의 제자도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보다 부활하셔서 사명을 주시고 성령으로 그들과 함께 하셨을 때,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으로 제자로 살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부활 신앙을 갖고 살며 부활 신앙을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을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로 완전히 변했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만나면 우리는 이전의 삶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고, 우리 삶을 이끌어 가실 수 있도록 모든 주권을 부활의 주님께 맡기는 일이 일어납니다.

 

2. 부활 신앙의 삶은, 어둠과 죽음을 이기는 믿음으로 살게 합니다.

        

     아담 때문에 죽음이 우리에게 들어왔으나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부활로 인해 우리 모두가 영원한 삶을 얻었습니다. 영원한 삶은 이 육체가 영원히 살아있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는 점점 늙어가고 흙으로 들어가기 위해 썩어져 가는 것일 뿐이고, 후에 썩지 않을 영원한 것을 덧입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부활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죽음과 어둠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고 결코 우리를 억압할 수 없다는 것이 부활 신앙의 소망이고, 예수님이 무덤을 열고 나오신 부활의 의미입니다.


3. 부활 신앙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고 싶게 합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난 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복음을 나누어야겠다고 믿고 선교 여행을 통해 남은 여생을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합니다. 그가 받은 복음,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우리도 그 복음을 만나면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처럼 부활의 주님을 만나 자신을 들여다 볼 뿐 아니라 사명을 갖고 수고하는 결과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계십니까? 그 은혜는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얻게 되는 능력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신 분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 은혜는 강물 같고 바다 같고 폭포수 같이 풍성해 다른 이들을 초청하고 용납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의 주님이심을 확실히 믿는 것! 뚫고 나가야 할 무덤 같은 어둠, 그리고 죽음을 이기는 소망의 삶을 사는 것! 그리고 이 복음을 함께 나누는 것! 이것이 부활 신앙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2021년 3월 27일 / 사순절 제6주, 종려주일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 4장 4-17절)


 

     사순절기에 맞는 이번 주일은, 종려주일 또는 고난주일이라고 말합니다. 종려주일은,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맞이한 주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맞이하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여전히 성경에서 반복되는 역설을 만납니다. 오늘은 에스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에스더서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1. 숨어 계신 하나님을 찾아내야 합니다.


     에스더서에서 참 이상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1장부터 10장까지 한 번도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에스더가 활동하던 시기는, 바벨론 포로기가 끝나고 에스라가 스룹바벨과 함께 고국으로 백성들을 데리고 온 1차 포로귀환 기간과 2차 포로귀환 기간 사이에 일어난 일로 봅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상당수 많은 사람들이 그 지역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에스더나 모르드개도 그 사람들 중에 있었습니다. 고국 땅도 아닌 낯선 땅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통하여, 비록 에스더서 본문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말씀가운데 숨겨져 계신 하나님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 스스로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하나님은 에스더서에서, 당신을 어떻게 드러내고 계십니까?

 

1)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무릎 꿇지 않습니다.  

     먼저, 에스더의 삼촌인 모르드개가 하만이라는 사람에게 무릎 꿇지 않았던 사실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왕은 아하수에로입니다. 그는 다리오왕의 아들로, 본래의 이름은 크세르크세스1세 입니다. 아버지 다리오왕 때부터 확장시킨 영토로 인해 인도에서 구스까지 많은 영역을 다스린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180일 동안 잔치를 벌일 정도로 화려함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아하수에로 왕이 잔치를 벌이는 중에 왕비를 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왕비 와스디는 명령에 따르지 않고 폐위됩니다. 그런 과정에 에스더가 왕비로 간택된 것입니다. 이즈음 우리는, 하만이라는 사람에게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아각 사람, 즉 아말렉 출신이지요. 그가 왕의 총애를 받다 보니 궁으로 들어오기 전 하만에게 절을 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유독 궁궐의 문을 지키는 모르드개만 그에게 절하지 않습니다. 모르드개 자신은 유다인으로,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절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나 하만이라는 어리석은 사람은 불타는 복수심으로, 모르드개가 속한 유다 민족 전체를 말살하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2) 유다민족과 에스더가 금식하며 준비합니다.

     두 번째, 유다민족과 에스더에게서 하나님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만은 왕에게 유다인들을 멸족시키겠다고 하지 않고 아주 교묘하게, 한 나라의 법률과 다른 법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을 가만두면 안된다고 돌려 말하면서 왕에게 뇌물을 들이 밉니다. 결국 왕은 자신의 인장 반지를 주고 조서를 꾸며 전국에 보내도록 허락합니다.   이 모든 소식을 알게 된 모르드개는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 중에 나아가 대성통곡합니다. 조서를 받은 각 지방 유다 민족들도 울며 금식하며 부르짖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왕께 나아가 유다민족의 살 길을 구하게 합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 모르드개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려고 왕비가 된 것은 아니지만, 왕비가 되게 하신 이유가 이 때를 위함이라고 말하는 모르드개를 보면,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에스더는 결단하며 권면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수산에 있는 유다 민족 전체에게 사흘 밤낮 금식하게 하고, 자신도 시녀와 함께 금식한 후에 왕에게 나아가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였기에 금식하며 준비합니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한 민족의 생존의 문제 앞에 온 민족이 같이 금식하며 기도하는 일이니, 얼마나 귀합니까?


3) 우연히 모르드개의 선행을 보게 하십니다.
     세 번째, 아하수에로 왕이 우연한 기회에 모르드개의 선행이 적힌 역사책을 보게 됩니다. 어느 날 밤 아하수에로 왕은 잠이 오지 않아서 역대 일기를 읽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자신을 해하려고 역모를 꾸민 내시 두 사람을 고발하였던 모르드개 이야기를 읽습니다. 지금 하만은 모르드개와 그의 민족을 말살하려고 하려는데, 왕은 모르드개의 선행을 발견하고 상을 주려고 합니다. 사람이 음모를 꾸미는 동안 하나님은 그 음모를 막으려고 일하시는 것과 같지요. 하나님의 통치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2.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영적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금식하며 준비했던 에스더를, 하나님은 아하수에로 왕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게 하셔서, 왕이 에스더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게 하십니다. 에스더는 왕에게 용기를 가지고 요청합니다. 에스더가 목숨 걸고 구원하려는 것은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자신의 민족인 유다인들 이었습니다. 아하수에로왕은 에스더의 요청을 듣고 하만의 만행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했던 장대에 하만과 그의 아들들이 매달리게 합니다. 이후에 그들은 부림절이라는 절기를 지키게 됩니다.

     매 번 강조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은 결코 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한 분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이 모든 사람의 고난을 대신하였고 한 분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하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모든 이들에게 특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견뎌가느라 어려운 시기를 보내지만, 세계와 나라와 교회를 위한 애통한 기도가 모아져야 하는 시기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도대체 안보이시는 것 같은 우리 하나님, 살아계시지 않는 것 같은 하나님, 그러나 지금도 우리 안에서 우리의 세계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관심이, 오롯이 나 자신에게만, 우리 가족에게만 있으면 안됩니다. 여러분은 영적 책임감을 가지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살아내는 것입니다.


2021년 3월 21일 / 사순절 제5주


성전을 다시 세우며

(에스라 3장 8-13절)


 

     오늘 본문은 에스라서로 ‘성전 재건의 역사’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며 다시 성전을 건축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야를 읽으며 무너진 성전과 성벽을 다시 세우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이미 읽었습니다. 오늘 다시 에스라의 성전 재건을 보며 ‘성전을 다시 세우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 읽어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마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1. 약속 기억 : "너는 나에게 속한 사람이다"


     에스라를 통해 성전 재건을 시작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다시 깨닫고 하나님 백성으로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 70년 동안 하나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이제 그들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우며 그들의 무너졌던 신앙을 다시 쌓고, 자신들의 신분을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가 신분을 결정하고 삶을 이끌어갑니다. 바벨론 땅의 포로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이 되도록 다시 성전을 세우게 하십니다.

 

2. 약속 실행 : "너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라"

 

     인간이 모인 환경이 때로는 하나님의 일을 거스르게 합니다. 느헤미야 말씀에서도 보았듯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따라 진행되는 것임에도 반대하는 사람들은 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더디어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지만 2년이 지나도록 성전 기초도 놓지 못한 채 우왕좌왕합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제단을 세우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성전 재건은 활발하고 거룩하게 진행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성전을 다시 세우도록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고 그것이 약속임을 알았다면 이제 실행에 옮기면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는 것으로만 끝나면 안 됩니다.

 

3. 약속 확인 : "나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전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성전의 기초를 놓으며 얼마나 기뻤을까요?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찬양하는 자손들은 제금을 들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감사 찬양이 온 이스라엘 땅에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그 약속을 믿고 살아간다면 감사히 찬양하며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을 보면 찬양하는 소리와 함께 울며 통곡하는 소리도 얽혀 있습니다.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도 두 개의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는 살기 어렵다고 통곡하고 우는 소리, 다른 한편에는 아무것도 없음에도 감사하고 찬양하는 소리입니다. 성경의 시편 곳곳에도 고난의 삶 가운데에도 하나님을 찬양한 시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 시편 노래들을 잘 들여다보면 고통의 소리와 찬양의 소리가 함께 섞여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과 고통 중에도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는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힘입니다. 요즘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그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확신을 가지고 “나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2021년 3월 14일 / 사순절 제4주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은?

(역대하 36장 11~21절)


 

     성경에는 많은 패러독스(역설)가 나옵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받고 싶으면 먼저 주라’, ‘약할 때가 강할 때’ 등이 우리의 상식과는 다른 역설을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패러독스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담긴 패러독스입니다. 유다 멸망에 관한 말씀으로, 하나님은 멸망을 회복의 방법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다를 패망하게 하시는 것을 어떻게 사랑이라고, 또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회복의 방법이지만,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패러독스입니다.


1. 상식과 논리를 뛰어 넘는 회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은 우리의 상식과 논리를 뛰어 넘습니다. 유다의 멸망을 통해서도 보여 주십니다. 시드기야는 남 유다 마지막 왕입니다. 당시 유다는 힘이 없어 다른 나라가 왕을 결정합니다. 이미 모든 통치권과 권력을 바벨론에게 빼앗겼습니다. 시드기야도 바벨론에 의해 왕이 되어 11년간 유다를 다스리지만 하나님 앞에 선 왕은 아니었습니다. 

     이 당시 활동하던 선지자가 예레미야입니다. 바벨론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를 전했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은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드기야는 이 말씀을 듣지 않다 비참한 결과를 맞이합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이기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벨론을 사용하십니다. 바벨론이 하나님의 채찍, 회초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상식과 논리를 뛰어넘습니다.

 

2. 말씀의 순종으로 얻는 회복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회복은 믿음의 중심이 견고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왕인 시드기야와 제사장들, 우두머리들, 백성들 모두 크게 죄를 지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피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경고해 주시지만 어리석은 지도자와 백성들이 제대로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본은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말씀에 순종해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며 우리에게도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의 본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은 믿음의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회복을 원하십니까?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고 순종하셔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때가 되어야 얻는 회복입니다

        

     마지막으로, 회복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차야 회복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70년 동안의 포로생활이 필요하다고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죄악 때문에 겪는 고통의 세월이면서 또 70년의 시간이 다 차야 회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들에겐 아프고 슬픈 역사가 도리어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 70년이 꼭 필요했던 회복과 안식의 시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들을 반드시 회복시키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방법으로 행하시지 우리의 논리와 상식으로 행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더 예민하게 귀 기울여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차면 다시 온전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어려운 지금 이 시대는, 하나님의 때를 채우는 시간입니다. 더 잠잠히 그러나 더 가까이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3월 7일 / 사순절 제3주


기도해야 하는 진짜 이유

(역대하 7장 12~22절)


 

     오늘 본문은 역대하 말씀으로 솔로몬 왕의 이야기를 다시 합니다. 성전을 건축하고 기도를 드리는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장면으로, 솔로몬을 친히 찾아오셔 만나 주시는 하나님을 통해 우리도 기도할 때 하나님이 친히 만나 주실 수 있다는 소망과 믿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하게 소통하기 위한 방법은 기도 밖에 없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점검도 기도입니다. 친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 기도이고, 친밀하지 않은데 하는 기도는 일방적인 요구일 뿐입니다. 오늘은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 하나님과 친밀하게 소통하며 기도해야 하는 진짜 이유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1.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 첫 번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오늘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경험해야 한다는 ‘현장성’과 ‘실제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인격적 만남’을 전제로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택하시면서 그 곳에 당신의 눈과 당신의 마음이 항상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친밀함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원한다면 기도해야 마땅합니다. 

우리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지금 현재, 현실에서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고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일이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2. 하나님의 경고를 듣기 위해

 

    두 번째, 하나님의 경고를 듣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들을 때는 마음 아플 수 있어도 반드시 들어야 하는 권면과 경고는 그 사람의 성장에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못 들으면 죄를 반복하며 구원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아는 길이 기도하며 하나님의 경고를 말씀 가운데 듣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는 기도의 경험 속에서 우리를 향하고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하는 진짜 이유, 하나님의 엄위하신 경고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3.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기 위해

   

     마지막으로, 기도해야 할 진짜 이유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며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로 인해 하나님께 속한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매일 만나야 하고, 만나고 싶어 그분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하루 중 언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정해진 예배시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의 숨결을 느끼며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에서 벗어날 때 우리를 엄하게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며 예배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시간을 보내며 이제 진짜 기도해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믿음으로 서로 격려하며 잘 이겨갑시다. 기도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므로 그분의 음성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며 나아갑시다.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는 그 충만함이, 지금 이 시대의 어려움을 능히 이기게 할 것입니다.


2021년 2월 22일 / 사순절 제2주


질병 치유 그 너머

(열왕기하 5장 1~19절)


질병 치유 그 너머

(열왕기하 5장 1~19절)


 

      지난주까지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오늘은 엘리야의 뒤를 이어 활약하는 엘리사 이야기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웃 아람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이 엘리사를 통해 치유 받은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이 이야기가 나아만 한 사람이 치유되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 속 나아만은,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며 그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봅니다.


1. 그의 질병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아람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이 나병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질병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하십니다.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어린 소녀가 자신이 살던 동네 이스라엘 사마리아에 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를 만나면 반드시 나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부터 나아만을 향한 구원의 계획은 시작됩니다. 나아만의 고통스러운 질병이 오히려 그의 영혼이 구원 받는 기회가 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2. 그의 순종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작은 여종의 이야기를 듣고 북이스라엘 사마리아에 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그를 직접 만나지도 않고 종을 통해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처방만을 내립니다. 나아만은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뜻밖의 처방에 실망하고 화를 내며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때 나아만의 종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그것보다 더한 일도 할텐데 뭐가 어렵겠냐고 나아만을 설득합니다. 결국 엘리사의 말을 듣기로 합니다. 용기도 필요했을텐데 그렇게 순종을 합니다. 그리고 병이 치유됩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계획은 우리가 나아만처럼 순종할 때 비로소 열매를 맺습니다.

 

3. 더 큰 계획 때문에 일하셨습니다

   

     나아만의 치유할 수 없었던 나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성경에는 불치의 병이 치유되는 기적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치유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하고 싶어 하시는 이야기가 병의 치유에만 국한되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 무엇보다 크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질병이 치유된 나아만이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다’고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만 예배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질병 치유의 기적이 그를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의 이야기는 병이 치유된 기적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질병 치유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에게는 질병으로만 여겨졌던 문제지만, 질병 그 뒤에 숨겨진 보화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이 있었습니다. 


     코로나로 온 세계가 혼돈으로 치닫는 이때, 우리 각자 영적으로는 어떤지 되돌아봐야 하는 시간입니다. 코로나로 인한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끝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문제의 해결에 그치는 응답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까지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나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 않은 이 때 우리가 다시 외쳐야 할 것은, 사회적으로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해도, 하나님과 그리고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영적 공동체와는 거리가 있으면 안 되는 친밀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치유의 말씀 그 너머에 비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계시는지를 들여다 보는 한 주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2월 21일 / 사순절 제1주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회복시키시는가?

(열왕기상 19장 1~18절)


 

     선지자 엘리야의 이야기를 통해 ‘회복’에 관하여 나눕니다. 엘리야가 갑자기 우울증에 가까운 모습을 보입니다. 홀로 800명이 넘는 사람과도 대결하며 450명의 사람들을 패배하게 만든 그가 낙심하고 두려워 숨습니다. 죽고 싶을 정도라며 자포자기한 모습입니다. 

     이런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십니다. 오늘 그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회복시키시는지를 봅니다. 그리고 이 회복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회복시키시는지 엘리야의 사건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1. 삶을 지켜보시며 회복시키십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당당하게 싸워 이겼습니다. 이 정도면 자신만만할 것 같은데 갑자기 두려워 광야로 도망을 칩니다. 당당했던 그의 모습은 없습니다. 지금 그의 상태는 탈진의 상태입니다. 바알과 아세라와 대결하고 아합과 이세벨과 맞서느라 진이 다 빠졌습니다. 육체와 정신 모두 탈진한 상태입니다. 광야에 자신을 숨기며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 죽고 싶다고 고백하는 자포자기한 상태의 무기력증이 지금 엘리야의 상태입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상황이고, 앞만 보고 열심히 사느라 쉬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쉽게 올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뜻밖에도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대로 지켜만 보십니다. 엘리야가 가는대로 그저 지켜보시기만 하시며 왜 그러냐고 다그치지도 혼내시지도 않으십니다. 우리 눈엔 침묵 같지만 계속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고통을 그냥 방치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 삶의 과정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 모든 과정을 충분히 겪고 나서야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2. 필요한 것을 채우시며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의 회복을 위해 개입하십니다. 그에게 꼭 필요한 것을 찾아 채우시며 회복시키십니다. 먼저 천사를 보내 일어나 먹으라고 하시며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주시며 엘리야의 육체적 필요를 채우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방법도 같습니다.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아십니다. 종종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요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필요한 것은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 정확합니다. 우리의 필요가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그것을 통해 회복될 수 있습니다.

 

3. 사명을 주시며 회복시키십니다

   

     지치면 무조건 쉬고 싶습니다. 하지만 충분한 휴식과 안식은 회복을 위한 과정이지 끝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탈진한 엘리야를 먹이신 후 ‘세미한 소리’로 다가오셔서 새로운 사명을 주시며 회복시키십니다 너무 지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에도 모두 내려놓고 그냥 쉬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필요를 채워주시고 사명을 주시면 다시 일어나 가는 것이 회복입니다. 


     엘리야를 지켜보시며 그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다시 사명을 주신 것처럼, 지금의 우리들도 지켜보시며 회복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채우시고 다시 세워주심을 믿으며 힘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펜데믹으로 모두가 움츠려 있지만 매일 다시 시작하고 매일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다시 선포합시다. ‘하나님이 먹이시면 다시 일어나 갈 수 있다.’


2021년 2월 14일 / 주현 후 제6주


다시 일어서려면

(열왕기상 18장 20~24절)


 

     코로나 19와 하루하루 전쟁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지난 일 년을 버티고 또 버티며 왔지만, 어느새 피로만 가득 지쳐갑니다. 이제는 일상에서도 그만 손을 놓고, 또 아예 손을 놓게 되고 이전의 삶은 어느새 흐트러져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계속 혼란과 어질러진 상황 속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다시 일상을 새롭게 하는 쇄신이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이 시대를,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회복하는 길을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나의 하나님 이름 부르기


     엘리야가 갈멜산에서의 대결을 제안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참신이심을 분명히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바알 선지자에게 먼저 기회를 줍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열심히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빌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전심을 다 해 바알신을 찾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바알에게 헌신하던 바알의 선지자들은 잘못된 대상에게 그들의 믿음의 열정을 다 쏟았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대상을 향해서는 아무리 부르짖고 피까지 흘려보지만 결국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바알과 아세라처럼 우리를 미혹하는 거짓 신들이 정말 많지만, 거짓 신들은 아무리 부르고 찾아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구하는 자를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우리 시대 우리를 너무나 쉽게 유혹하는 바알신과 아세라신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참된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나의 무너진 제단 다시 쌓기

 

     이제 엘리야가 나섭니다. 제단을 준비하며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을 붙일 수 없도록 물을 가득 붓습니다. 제단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엘리야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무너진 제단을 수축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까이 불러 제단을 수축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도록 합니다. 이들이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 이후, 남과 북으로 갈리며 점점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바알과 아세라 상까지 세웠습니다. 그렇게 되니 이제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께 예배 드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고 깨진 것을 회복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제단을 수축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고 회복시키는 일을 시작합니다. 갈멜산 대결에서 하나님의 제단에 하나님의 불이 임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사실 이것은 과정일 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떠났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무너진 제단을 다시 수축하고 영적으로 흩어진 삶을 다시 회복시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지금 바로 우리에게도 필요한 우선순위입니다.

 

3. 나의 기도 회복하기


     제단을 수축한 후, 선지자 엘리야가 기도합니다. 바알 선지자들과는 달리 요란한 행위 없이 오직 여호와께 잠잠히 기도합니다. 간결하고 간단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택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이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 제단 위와 그 주변을 완전히 불태워 버립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엎드려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도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교회를 비난하고 교회에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해달라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너진 신앙의 기초를 다시 쌓고, 확실한 믿음을 세워, 믿음의 능력을 이 세상에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850대 1의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참되신 하나님이 함께하시느냐 함께 하시지 않느냐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일상의 삶 속에 우리의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 순간 그분을 찾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예배하는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무너진 것들을 다시 수축하고 회복해 하나님의 복된 삶을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021년 2월 7일 / 주현 후 제5주


하나님의 위로는 특별하다

(열왕기상 17장 1~7절)


 

     과거의 역사는, 현재를 되돌아보게 하는 기회이며 미래를 준비하도록 성찰하게 하는 기억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역사 이야기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펴보면서 시대를 초월하고 공간을 넘어 오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발견했으면 합니다. 선지자 엘리야의 이야기와 함께 그와 연관된 사람들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시는지, 특별히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볼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위로는, 시대를 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시대를 넘어 있습니다. 본문은 아주 먼 옛날 북이스라엘 아합 왕 시대의 일입니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이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 두 개의 나라로 분단되어 오랜 기간을 보냅니다. 북이스라엘의 지도자 여로보암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우셨다는 것을 잊고, 자신의 뜻과 생각대로 나라를 치리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여로보암의 가문에 속한 남자들을 다 끊어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후 여로보암의 가문이 말씀대로 멸족될 뿐만 이어지는 왕마다 피의 역사를 갖게 됩니다. 아합 왕도 북이스라엘을 22년간 다스렸는데 그 역시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아내 이세벨을 통해 다른 신들을 들여오며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건축하고 아세라 상을 만들어 섬기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보내시며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올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엘리야를 통해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났기에 벌을 받아도 마땅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시대를 넘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입니다. 시대를 넘어 이제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세우시려는 하나님, 우리도 시대를 넘어 보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만나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위로는,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그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고 계시는 것을 봅니다. 오랜 가뭄은 아합 가문에게 주신 하나님의 벌입니다. 아합 때문에 이렇게 애꿎은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엘리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가뭄을 예언한 후 아합을 피해 그릿 시냇가에 숨어야 했습니다. 가뭄인데도 시내는 마르지 않게 하셨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먹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와 함께 하시며 섬세하게 그를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세우시고, 그를 숨기시고 먹이시는 이 구체적인 과정을 보면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확실히 믿고 의지한다면, 우리를 위로하실 때에도 구체적이실 수밖에 없음을 봅니다. 자녀에게 필요한 것은 아버지가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사르밧에 사는 한 가난한 여인을 찾아가게 하시고 그 여인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라고 합니다. 이 가난한 여인이 순종하며 얼마 안남은 가루로 떡을 만들어 대접을 합니다. 그리고 이제 엘리야를 먹이신 하나님은 이 여인도 먹이십니다. 채우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3. 하나님의 위로는 절망을 넘게 하십니다


     그런데 얼마 후 사르밧 여인의 유일한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엘리야를 만나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을 알고 나니 자신이 죄인인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도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야가 이 아이를 안고 다락방에 들어가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살려 주십니다. 

     이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을 잘 섬겼고, 순종도 했는데 왜 아들이 죽었을까?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 최선을 다해 살지만 언제든 이 여인처럼 절망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구원 받은 이후 겪게 되는 고통에 신앙적인 의문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이 여인이 절망을 넘어가게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치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며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시대를 넘어 위로하시고, 구체적으로 위로하시고, 절망을 넘어 위로하십니다.


2021년 1월 31일 / 주현 후 제4주


여로보암을 통해 깨닫는 것 

(열왕기상 12장 25~33절)


 

     120년 동안 이어졌던 이스라엘 통일왕국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남북으로 분열됩니다. 성경은 분열의 원인으로 솔로몬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들 르호보암은 지혜롭지도 못해 백성들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10개 지파가 르호보암이 아닌 여로보암을 왕으로 선택합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 왕 밑에서 공사를 감독했던 감독관이었습니다. 솔로몬이 감동했을 정도로 솔로몬 밑에서 성실하게 일했던 여로보암을 하나님도 지켜보셨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그를 택하시고 이스라엘 10개 지파를 그에게 주신다는 예언을 주십니다. 

     여로보암에게는 탁월한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열 지파를 다스릴 능력도, 백성들을 모을 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잊지 말아야 했던 것은, 그에게 권력을 주시고 나라를 다스리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로보암도 르호보암처럼 그 사실을 놓쳤습니다. 여로보암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이 주신 것에서부터 시작하라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 이스라엘 열 지파를 다스립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약속해 주신 말씀이었다고만 기록합니다. 그가 이룬 것이 아닌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왕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을 지켜 행하기만 하면, 그 나라를 견고하게 유지시켜 주신다는 약속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그 약속을 잊어버립니다.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셨으니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되었습니다.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임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하나님과 동행했더라면 실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것에서 시작해야 살 수 있고 감사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2. 흔들리고 싶지 않다면, 변함없는 것을 잡아라

 

     두 번째, 흔들리고 싶지 않다면 변함이 없고 흔들림이 없는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르호보암에게로 갈까 두려웠습니다. 백성들이 ‘나를 떠나면 어떻게 하지’ 하며 불안해하고 흔들립니다.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 약속을 계속 상기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불변하시며 변개함이 없는 분이십니다. 

     믿음으로 살아도 흔들릴 수 있고, 자주 불안과 염려가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우리는 깨어있어 주님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불안과 염려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견고하고 변함없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으니 나는 흔들릴 수 없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흔들리고 쉽게 변하는 이 세상에서 그 흔들리는 것을 붙들지 마시고 절대 변하지 않으시는 우리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3. 믿음의 본질을 회복하라


     세 번째, 믿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구약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그리고 네가 사는 곳, 네가 영향력을 끼치는 그 곳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물으십니다. 그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매순간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삶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믿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일은 삶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로보암은 인간적인 불안함으로 인해 믿음으로 살지 못했습니다. 예배 장소와 절기를 바꾸며 자기 뜻대로 하면서 불안을 해소했습니다. 결국 믿음의 본질을 잃어버린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은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여로보암의 가문을 끊어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그리스도인은 삶에서 믿음의 열매를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열매는 단순히 드러나는 공적이나 공로가 아닙니다. 생명으로 귀결되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의 종노릇하며 살면, 절대로 거룩한 열매,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서부터 시작하라!’, ‘흔들리고 싶지 않다면, 변함없는 것을 붙들어라!’, ‘믿음의 본질을 회복하라!’ 여로보암을 통해 배웁니다.



2021년 1월 24일 / 주현 후 제3주


르호보암이 놓친 것 

(열왕기상 12장 1~17절)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시대가 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그리 녹록하지 않음을 전제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솔로몬에게 그가 범한 죄악으로 인해, 아들의 대에 나라가 분열될 것이라고 경고하셨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말년에 이미 그 조짐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 가운데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잇습니다. 어수선한 상황 속에 지혜나 리더십도 아버지 솔로몬과 같지 않으니 어려움이 컸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이런 위기에 어떻게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는지를 보면서, 그에게 꼭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가 놓친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1. 아버지 솔로몬의 지혜를 배워야 했습니다


     솔로몬 말년에 여러 상황이 어렵긴 했지만, 오랜 시간 아버지 솔로몬을 통한 이스라엘의 흥왕함을 보았고, 리더십도 보았습니다. 아버지 솔로몬이 보여 준 지혜와 능력과 통솔력 등, 미리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갖출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솔로몬에게 배우고 듣지 못했다면, 왕으로 백성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며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면서 먼저 하나님께 ‘듣는 지혜’를 달라고 구했었습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성경에서는 백성들에게 포학한 말로 대답했다고 기록합니다. 힘들어하는 백성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 주지 못하는 왕으로 공감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솔로몬이었다면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르호보암은 아버지 솔로몬에게 지혜를 배워야 했습니다.

     이를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앞 세대들의 소리도 잘 들을 줄 아는 것이 지혜이고, 뒷 세대들을 존중하며 경청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더욱이 요즘처럼 너무 빠르게 삶이 달라지는 시대에는 앞뒤 세대들의 이야기를 잘 들으며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했습니다

 

     르호보암은 자신의 마음을 결정할 중요한 사안 앞에 3일이라는 시간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 3일 동안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 물었다는 구절은 나오질 않습니다. 아버지 솔로몬처럼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통치를 시작했어야 했는데 그는 전혀 그럴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의 어리석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솔로몬의 신하였던 여로보암에게 이미 이스라엘 10개의 지파를 넘겨주신다고 말씀하셨고 지금 그 말씀을 이루어 가십니다. 르호보암의 어리석음까지도 미리 내다보신 것입니다. 

     팬데믹으로 어려운 이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이 바로 “주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주님의 뜻을 가르쳐 주세요”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일입니다.

 

3.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의 사사들과 왕들 모두 하나님이 통치자로 친히 세우셨다고 기록합니다. 첫 번째 왕으로 사울을 지목하여 세우셨고, 다윗도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리와 권위, 그 직업을 부여하셨다고 하는 소명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르호보암이 솔로몬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믿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왕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셨음을 알고, 일찍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결과로 결국 이스라엘 10개의 지파 백성들이 르호보암이 아닌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우며 120년간의 통일왕국 시대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르호보암이 놓친 것을 통해, 이 시대, 우리가 반드시 붙들고 버텨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이며, 모든 결정 앞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일입니다.



2021년 1월 17일 / 주현 후 제2주


마음에 방향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11장 1~13절)

 


     오늘도 솔로몬 왕 이야기입니다. 열왕기상에 나오는 솔로몬 이야기를 통해, 지도자의 공동체를 향한 목표와 목적이 흔들리게 될 때, 어떤 일을 벌이게 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리더라는 한 개인이 가져야 할 신앙적, 윤리적 덕목도 중요하지만, 끝까지 공동체의 선을 위해 애쓰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지난 첫 주에 솔로몬이 꾼 꿈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시는지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삶에 복을 주시고 그가 치리하는 나라에도 더불어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말년에 그의 마음과 태도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물론, 그 일은 예고된 결말이기도 했습니다. 솔로몬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1. 많은 이방 여인들을 사랑했습니다.


     솔로몬은 많은 이방 여인을 사랑했다고 전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솔로몬의 마음이 방향을 달라진 것입니다. 그의 사랑이 방향을 바꾸어 이방 여인들에게로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방 사람들과 서로 통혼하여 다른 신들을 섬기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것을 염려하시고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혼인정책을 통해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혼인으로 아내들만 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믿는 신들도 같이 왔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잘 알고 계셨기에 금하셨던 일입니다. 결국, 솔로몬은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의 여인들이 솔로몬의 마음까지 돌려놓으며 다른 신들을 따르게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견고했던 솔로몬이었지만 그 마음이 돌아서게 됩니다. 하나님에게서 돌아섰고, 아버지 다윗과 같은 마음을 갖지 못하며 하나님 앞에 온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이방의 아내들을 들였을 뿐인데 하나님을 사랑했던 마음에 변화가 생겼고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2. 이방 신들을 섬겼습니다.

 

     솔로몬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분별력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아내로 들인 여자들에게 마음이 쏠리기 시작하면서, 그들을 위해 신전까지 지어 주었습니다. 솔로몬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노년이 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합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을 때에는 일천번제도 드릴 만큼 정성스런 예배자이며 하나님 앞에 지도자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백성을 염려하기도 한 성군이었지만 그의 마음이 방향을 잃고 헤매어서 과녁을 벗어나니 이런 일들이 생긴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서도 ‘방향’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도록, 하나님을 향해 있도록 계속 권면합니다.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자 그의 몸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들에게로 향합니다. 마음의 변화가 이방 신들을 섬기는 지경까지 이른 것입니다.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 어떤 대상을 예배하는지가 우리의 마음의 방향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3.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솔로몬 한 사람의 마음이 달라진 것뿐인데 그 변화는 나라 전체에 영향을 끼칩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타락하니 고스란히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백성들입니다. 그만큼의 몫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고 복을 주십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수많은 약속들이 다 복인데,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행할 때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어떤 조건을 이행하면 얻을 수 있는 보상적 복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 살려면, 당연히 그 나라의 법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게 하나님의 백성이니 당연히 하나님 백성의 삶의 방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솔로몬의 타락을 개인 한 사람의 타락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 백성의 타락과 동일한 선상으로 봅니다. 솔로몬 한 사람 때문에 나라가 분열되었다고 해석합니다. 이처럼 성경 속 하나님이 세우신 인물 한 사람은, 한 공동체를 대표하면서 그 공동체의 흥망성쇠도 상징합니다. 그 한 사람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일, 하나님께로 마음을 향하는 일, 그것은 개인이 아닌 그 공동체가 함께 하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반드시 우선순위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 순위에 우리의 마음이 따라 갑니다. 마음이 가는 그것이 우리의 보물입니다. 때론 그것이 우상이 됩니다.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게로 향하면서 다른 신들을 용납하게 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려움을 안고 시작한 새해입니다. 마음이 분주하고 혼란스럽고 무거움도 여전합니다. 그런데 이 때,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향한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 마음에도 방향이 있는데, 지금 마음이 향해 있는 곳으로 우리 몸이 덩달아, 우리의 삶과 더불어, 그 쪽을 향해 가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신 여러분이 힘을 내 주십시오. 그래야 교회들이 삽니다. 그리고 나라가 삽니다. 여러분 마음의 방향이 삶을 이끕니다. 임마누엘!


2021년 1월 10일 / 주현 후 제1주


그 성전만 성전인가?

(열왕기상 8장 22~30절)

 


     오늘 본문 열왕기상 8장은, 다윗 왕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봉헌한 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을 봉헌한 솔로몬의 마음과 그 기도 내용에 집중합니다. 오늘은 그렇게만 볼 것인가? 의문을 제기해 봅니다. 그 시대에만 존재하는 하나님으로 기억한다면, 그의 성전건축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겠지만, 시대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때, 오늘날에는 어떤 중요성이 있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2021년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읽혀져야 할 것입니까? 


     오늘의 본문을 통해 우리는, 그 첫 물음을 이렇게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우리에게도 성전인가?


     엄밀히 말해, 그 성전이 우리에게는 성전이 아닙니다. 역사적, 지역적, 영적 의미로도 성전은 아닙니다. 솔로몬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성전일까요?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께도 그 곳은 성전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은 건물로 지어진 한정된 공간이 결코 아닙니다. 그 분이 거룩한 영이시고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신데 우리가 만든 어느 특정 공간에만 계시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 성전이라면, 하나님이 친히 지으신 이 세상이 전부가 그 분이 계실 수 있는 성전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건축물로 지어진 특정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면 어디든지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미 태초에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얼마나 웅장한지, 얼마나 멋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성전이 성전으로서 하나님이 거하실 곳인가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건축하고 싶은 그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 솔로몬에게 그 일을 맡기십니다. 하나님의 본래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둘 장소입니다. 성전에 하나님의 이름이 둔다는 뜻은,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곳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하고 그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성전을 봉헌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거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인간이 건축한 성전에도 감히 오시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솔로몬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니 기도를 들으시고 간구에 응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솔로몬은 이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하며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에 구체적으로 응답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안에 와서 기도하든, 이방인들이 성전을 향해 기도하든, 주의 이름이 거기에 있고,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므로, 이들의 부르짖음을 불쌍히 여기셔서 들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심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펜데믹으로 인해 제대로 함께 모이지 않는 지금에, 다시 교회에 모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더욱 더 우리가 성전 안에서 살고 있는지를 되물어 보아야합니다. 우리의 성전은 어디입니까? 진정으로 우리가 짓고 봉헌해야 할 성전이 어디일까를 묵상합니다. 

     솔로몬이 정성껏 준비하고 열심히 세우고 지어서 하나님께 드린 성전, 오늘날은 무엇으로 확장되었습니까? 결국 어디까지 왔습니까? 솔로몬이 만든 하나님의 성전에서, 우리 몸까지 왔습니다. 그럼,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으로 살도록 돌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그 곳이 어디인가?’라는 물음보다 더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도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예배하는 나는, 하나님나라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가?’ 

     솔로몬이 세운 성전은 바벨론이 와서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허물어뜨렸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저 이름만 남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면, 코로나가 바벨론이 될 것이고 우리는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어려운 때, 성전으로 지어진다면, 코로나는 초대교회가 받았던 박해가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을 만듦으로 우리 한국까지 그 선교의 씨가 뿌려졌던 것처럼 새로운 열매를 맺기 시작할 것입니다. 

     코로나가 참 아프지만 기회입니다. 다시 세울 수 있는 기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시간, 다시 견고해 질 수 있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2021년 1월 3일 / 성탄 후 제2주 (신년주일)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열왕기상 3장 4~15절)

 


     새해 첫 주일입니다. 어렵사리 지난 한 해를 건너왔습니다. 올해도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서로 격려하며 잘 이겨 나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신년주일 첫 본문은 열왕기상 3장입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를 이어가며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섰는지를 그려주는 본문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마음에 드는 기도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솔로몬의 기도를 마음에 들어 하셨던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고민하며, 하나님이 꾸시는 꿈을 우리도 같이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왜 솔로몬의 기도가 마음에 드셨을까를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의 기도가 마음에 드셨다면 우리의 기도 방법이나 내용에도 분명한 교훈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무엇을 보신 것일까요?


1. 그의 정성스런 예배를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정성스럽게 예배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정성껏 예배를 드린 솔로몬을 먼저 보신 후 꿈에 나타나 그에게 소원을 물으시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진실한 마음, 정성스런 예배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 예는 초대교회 당시 고넬료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방 군대 장관이었던 고넬료에게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베드로를 보내 그와 그 가족 모두를 구원하십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고넬료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드린 기도와 삶을 지켜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예배하며 기도하고, 삶으로 보여 주는 열매를 보고 계신다면, 그래서 우리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한다면, 우리의 태도를 고쳐야 할 것입니다.


2. 그의 백성들을 향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어떤 마음을 보신 것입니까? 그의 태도(attitude)를 보신 것입니다. 백성을 향한 어진 왕의 태도가 눈에 띕니다. 자신의 마음에는 온통 백성들을 어떻게 치리하면 좋을지 그 생각 밖에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구한 것이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였습니다. 그의 마음이 사사로운 탐욕에 있지 않고, 백성들을 잘 치리할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에 있음을 보시고 하나님도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우리도 어떤 위치에 서게 되고 그 공동체를 이끌어야 한다면, 그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할 것입니다.


3. 그의 기도 내용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예배하는 모습도 보시고, 그의 마음도 읽으시고, 그가 하는 기도 내용까지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구하는 것을 들으시고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솔로몬의 기도를 구체적으로 듣고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 내용을 다 듣고 솔로몬이 구한대로 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실까요? 우리의 필요와 욕구가 아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필요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맞게 기도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의 핵심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입니다. 솔로몬이 부와 권력과 장수를 구하지 않고 먼저 그 나라를 어떻게 지혜롭게 다스릴까를 구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를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적용하면 될까요?  

     솔로몬이 응답 받은 기도에 관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전반을 다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가 드리는 예배도 보셨고, 백성을 향한 마음도 보셨고, 구체적으로 구하는 기도도 들으셨습니다. 

     올 한 해 솔로몬처럼,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생하게 삶에서 간증되고, 그 삶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함께 살도록 초청하기를 바랍니다.


2020년 12월 27일 / 성탄 후 제1주 (송년주일)


네 가지 결단

(느헤미야 13장 1~3절)



2020년 마지막, 송년 주일입니다. 올 한해 어려운 가운데 믿음으로 잘 버티신 여러분들을 축복합니다.  

느헤미야 마지막 강해입니다. 느헤미야가 고국에 돌아와 무너진 성벽을 52일 만에 완공하고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갱신하며 온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결단을 합니다.(느10장)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다 정리하고 느헤미야가 잠시 페르시아에 간 사이에 이 약속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없는 사이에 유다 백성들의 삶이 예전 그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성전을 함부로 모독하며 십일조를 내지 않고 안식일도 범하고 이방 사람들과 통혼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가 아주 단호하게 결단하며 이 모든 일들을 치리합니다. 

느헤미야의 이 결단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영적인 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느헤미야 말씀을 마무리하며 그의 결단이 오늘날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요구되는 마음이라 여겨집니다. 


1. 거룩하게 살기로 결단하십시오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와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하게 살 것을 권면합니다.  

당시 제사장 엘리아십은 영적 지도자로 유다 백성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살아가도록 도와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산발랏과 함께 성벽 재건하는 일을 방해하고 대적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결탁을 합니다. 친한 정도가 아니라 십일조와 헌물들을 넣는 성전의 큰 방까지 도비야에게 내어 준 엘리아십의 태도를 보면서, 너무 쉽게  세상의 가치에 마음을 놓아주는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봅니다. 

이에 느헤미야가 유다 백성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아라!’ 요구를 합니다. 2021년 새해에도 여전히 어려울 것이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하게 살기로 결단합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들여다보며 거룩하게 살기를 결단합시다.


2.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기로 결단하십시오


두 번째,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는 결단입니다. 물질이 반드시 필요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가 물질로 사는 존재가 아님을 당당히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의 본래적 성격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무엇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영적 생존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유지됨을 고백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십일조에 대한 결단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결단이기도 합니다. 물질이 필요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나는 물질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사는 사람이다’라고 믿음으로 결단할 때입니다.


3. 예배시간을 구별하기로 결단하십시오


세 번째, 안식일의 회복을 위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유다 백성에게 안식일을 기억하고 분별하도록 권면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규례가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을 소중히 지키고 구별하는 것과 같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예배드리기가 어려워지면서 ‘예배’라는 무게감이 가벼워졌습니다. 실시간 중계로 예배드리며 ‘현장성’이 무너졌고, 녹화된 예배를 보며 예배를 관망하고 시청하고 평가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안식일 규정의 회복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시간에 대한 구별’로,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을 마음대로 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따로 떼어 구분하라고 하신 날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4. 가정을 믿음으로 세우기로 결단하라


마지막 네 번째 결단은, 유다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약속했던 이방 민족과 통혼하지 않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경책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의 자녀와 결혼시킴으로 순수혈통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자녀들은 자신들의 언어도 잊어버렸습니다. 이에 느헤미야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합니다. 느헤미야의 결단은 아주 단호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정을 믿음으로 정결케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점점 더 그 일을 해내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갑니다. 하지만 가정에서 믿음을 지키는 정결성을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구하며 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2021년이 나흘 남았습니다. 


우리 모두 새롭게 다시 결단합시다.

1. 거룩하게 구별되어 살겠습니다.

2.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겠습니다.

3. 예배시간을 구별하겠습니다

4. 가정의 정결함을 유지하겠습니다. 


2020년 12월 20일 / 대강절 제4주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

(시 84:1~12, 엡 2:20~22)


오늘은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강절 넷째 주일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창립된 지 14주년 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 교회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생각하고 떠올리는 교회의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과정과 함께 광야에서 시작한 성막을 통해 경험한 것으로부터 바벨론 포로기를 겪으며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드린 예배의 기억과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 이루어진 초대교회의 역사까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복음 전파의 역사가 전 세계를 돌아서 우리에게까지 왔습니다. 수 천 년의 역사가 지나갔다고 해도 이 세상을 시작하시고 이끄시고 구원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상실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팬데믹으로 혼란해진 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고 우리들의 교회는 어떻게 서야 할까요? 이제 14주년 된 우리 교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교회이며 거룩한 성전이라고 할 때, 우리가 더 건강한 교회로 서기 위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1. 우리의 성소를 회복해야 합니다.


성소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교회라고 한다면,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거룩한 곳, 성소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모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성소의 회복은 그 분의 부르심을 강화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성소의 회복에는 내적 성소와 외적 성소가 있습니다. 먼저 회복해야 할 내적 성소는 내 안에 이미 와 계신 주님의 자리를 강화시키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우리 안이 성소가 되는 것으로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사시는 공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회복해야 할 외적 성소는 성도들이 현재 믿음 생활을 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반드시 교회이어야 한다는 말씀은 아니지만 우리가 지금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의 교회가 우리에게 성소인가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함께 울며 웃으며 고민하며 경험하는 외적 성소로 우리 교회가 자리를 잡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더 바라기는 우리 교회가 여러분들에게 성소의 기억으로 남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우리의 골방을 회복해야 합니다.


성소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장소를 의미한다면, 골방은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과만 만날 수 있는 은밀한 곳으로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입니다. 골방이란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는 사적 공간으로 하나님과만 만나고자 마련하는 시간과 공간을 모두 의미합니다. 시대가 혼란하면 혼란할수록, 우리의 마음이 분주하면 분주할수록 우리는 골방이 더욱 필요합니다. 골방 없이는 기도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동체가 함께 하는 거룩한 장소 뿐 아니라 홀로 하나님과 은밀하게 만날 수 있는 ‘나의 골방’이 필요합니다. 각자의 거처에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교회가 골방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회복해야 합니다.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장소와 시간으로 교회에 오면 하나님과 은밀하고 조용하게 만나는 골방의 경험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골방에서는 하나님을 만나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골방은 우리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지만 타인의 아픔을 안고 주님과 단독으로 서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교회가 여러분의 기도의 골방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골방을 회복하십시오. 


3. 임마누엘 하나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시편 84편의 마지막 10~12절에서 시인은 주님 계신 곳에서 살고 싶은 심정을 표현합니다.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성전의 진정한 의미는 장소나 건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임재 사건에 의미가 있습니다. 성소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은혜의 장소라는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그 친밀함이 있습니까? 여전히 낯설고 먼 것은 아닙니까? 우리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당신의 백성을 비추시고 보호하시는 해가 되시며, 우리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막으시는 방패가 되십니다. 당신을 사모하는 백성들에게 은혜와 영화를 주시고 정직한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교회가 걸어 온 14년,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우리의 교회가 여러분의 성소가 되고, 골방이 되고, 임마누엘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어려운 때를 살지만, 반드시 회복합시다.


2020년 12월 13일 / 대강절 제3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느 12:44~47)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며 보내는 대강절 셋째 주일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렇게 교회력을 지켜가는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해 내기’를 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기억해 내는 작업이 필요한 것은, 정말 잊고 살지 말아야 할 것은 잊고,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했던 작업이 그런 것입니다. 성벽 재건으로 끝나지 않고 온 백성들을 다 불러 성벽을 하나님께 올리며 예배하게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된 데에는 이런 느헤미야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1. 공동의 기억이 있어야 합니다.


공동의 기억이란 함께 공유하는 신앙적 기억을 의미입니다. 인간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함께 하는 공동체를 같이 경험하며 남기는 기억들이 공동의 기억인데, 일차적인 장은 가정으로 가장 많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학교나 교회 등 사회 안에서의 기억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을 기억해 낼 공동의 기억도 필요합니다. 그 기억의 장이 예배이고 아이들에게는 교회학교이고 어른들에게는 교회공동체입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성벽과 성전을 재건하며 다시 회복하려고 했던 예배도 그들이 역사적으로 기억하는 공동의 경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따라 해마다 절기를 기억하고, 그 법에 맞추어 삶을 살아온 이유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역사적으로 공동의 기억을 가지고 이어져 왔기 때문임을 느헤미야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벽을 재건하면서도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낭독하고 함께 예배하며 신앙적인 공동의 기억을 만들어 간 것입니다.  

지금의 코로나 시대에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떤 신앙적인 공동의 기억을 남겨 줄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커서 ‘나 어릴 때 교회에서...’라는 스토리를 엮어 낼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가정예배를 드리는 경험도 좋은 기억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믿음의 기억은 분명히 지금까지 살아온 신앙의 삶을 한층 더 풍요하게 하고 또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2. 생명 지향의 삶이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처음 고국 땅에 도착했을 때, 그는 유다 백성들을 살리고 싶어서 애를 썼고, 몇몇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런 느헤미야를 죽이려고 애를 썼습니다. 느헤미야가 어떻게 살아남았습니까? 그의 목표와 비전이 생명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성을 살리고 싶은 비전입니다. 느헤미야가 이 비전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나아갔기 때문에 성벽도 재건하고 백성들을 예배 자리에 나오게 하며 그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성벽 봉헌 예배를 드린 후에도 느헤미야의 관심은 오로지 유다 백성들을 살리는데 있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들이 계속된다고 해도 우리를 일깨워 살아가게 하는 힘은 생명에 있습니다. 이 생명지향의 삶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사명입니다. 


3. 형제 사랑의 삶이어야 합니다.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이야기는 자신을 사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형제를 사랑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형제사랑을 새 계명으로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지키며 살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느헤미야 한 사람의 변화가 유다 백성 전체의 변화에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원리를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이미 오신 예수님께서 그 삶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자신의 삶에만 집중했다면 예루살렘 성벽은 여전히 허물어진 채 그대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삶에서부터 민족이라고 하는 좀 더 확장된 자신의 조국을 향해 열려 있으므로 인해 큰일을 해 낸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한 하나님의 사람 느헤미야의 헌신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를 물으며 지금부터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함께 기억하는 일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살아가게 할 것인가 하는 마음을 함께 품을 수 있는 생명지향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욱이 그 지향은 나에게 국한된 삶이 아니라 더불어 내 형제 이웃 온 세계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십시다.


2020년 12월 6일 / 대강절 제2주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가?

(느 12:27~30)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강절 두 번째 주일에 느헤미야가 성벽을 봉헌하는 이야기를 함께 봅니다. 바벨론에게 무너진 성벽은 140여 년이 넘게 그대로 방치되다 느헤미야가 재건합니다. 목표는 성벽재건에만 있지 않았고 무너진 신앙을 다시 구축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게 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성벽을 보수하고 재건한 후 하나님께 봉헌하는 예식을 갖는 것은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어렵게 성벽을 재건해 낸 것도 기쁨이었지만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것도 기쁨이었습니다. 성벽을 봉헌하며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을 회복한 유다 백성들을 통해 우리 또한 영적 즐거움을 회복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즐겁게 성전 봉헌식을 준비하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며 여러 고비를 넘기고 지속적으로 문제에 부딪혔지만, 그때마다 기도하며 잘 이겨냈습니다. 이제 성벽 봉헌식을 준비하는 내내 그에게는 감사와 찬양과 기쁨이 넘칩니다. 그리고 봉헌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레위 사람들과 찬양하는 사람들, 제사장들을 다 준비시킵니다. 성벽 위에 올라서 행렬을 지어 성벽 주위를 돌아 성전으로 돌아오는 의식을 합니다. 두 개의 행렬로 진행되는데, 한 행렬은 에스라를 선두에 둔 행렬이요, 다른 행렬은 느헤미야가 맨 끝에서 따라가는 행렬입니다. 자신이 앞서지 않고 뒤에서 백성들을 돌보는 겸손함도 보입니다. 에스라가 이끄는 대열과 느헤미야가 이끄는 대열은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다시 만나며 봉헌의 마무리가 하나님을 향합니다. 이 모습이 하나님의 사람이 사는 방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을 재건하고 기쁘게 봉헌하며 즐거움을 회복한 모습을 통해 우리의 즐거움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중에 회복되는 즐거움이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을 잘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2. 기뻐 찬양하며 성벽 위를 걷다


느헤미야의 마음에는 성벽을 재건하고 봉헌하는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봉헌을 준비하며 느헤미야가 계획한 것은 성벽 위를 밟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걷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함께 노래하고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룬 일이니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이었을까요? 그들의 찬양은 기쁨의 소리였고 그 기쁨은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었습니다. 찬양하는 기쁨의 초점이 하나님께 있었지만 기뻐하고 찬양하는 그들에게도 기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쁘시면 우리도 기쁩니다.


3. 하나님이 즐거워하게 하시다


그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심히 즐거워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고 기록합니다. 부녀와 어린 아이들도 즐거워했고 그 도시 전체에 울려 다른 곳까지 멀리 기쁨이 퍼졌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도 이 기쁨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요즘의 엄혹한 현실을 바라보며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때 물어야 할 구체적인 질문은 기쁨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지 그 근원을 정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기쁨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지키는 이 절기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진정한 기쁨은, 현실이 달라지거나 문제가 없어지는 것에서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그 기쁨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좇다가 실패하고 결국 십자가 지신 예수님 앞에서 다 도망가 버린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영광을 얻는 길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십자가를 지시므로 얻게 되는 온 세상의 구원의 기쁨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을 전하는 천사들이 말합니다. 

현실을 보면 아직도 막연한 소망,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면 보이게 되는 영광의 내일! 우리 함께 기다리며 견뎌내십시다.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강절에 참 소망을 전합니다.


2020년 11월 29일 / 대강절 제1주


잊을 수 없는 이름 

(느 11:3~9)


11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번 주부터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강림절이 시작됩니다. 올 한해는 코로나와 맞서 싸우느라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게 지났습니다.


다시 느헤미야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도시로 재정비하고 회복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배치하는 말씀까지 나눴습니다. 예루살렘에 정착할 첫 부류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나머지 주민들은 제비를 뽑아 십분의 일이 와서 살도록 했습니다. 두 번째 부류로 제사장과 레위 가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들과 성전 봉사자들, 노래하는 사람들 등의 봉사자 가문 목록이 등장합니다. 느헤미야가 얼마나 치밀하고 섬세하며 대단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는지 인구를 배치하는 곳에서 그대로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 첫 번째 특징은, 예루살렘에 아무나 들어간 것이 아니라 혈통적으로 순수하게 정통성을 이어간 사람을 중심으로 먼저 들어가게 했다는 것과, 그리고 배치를 지도자, 제사장, 레위인, 기타 봉사자들 순서로 언급하여 영적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과 자원함입니다. 도시를 세우기 위한 백성들의 자발적 순종들이 있었습니다. 인구의 10분의 1이 왔으니 대표성을 지닌 백성들이었고 그들의 헌신이 새 역사를 씁니다. 

세 번째 특징은, 모든 것이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겼고 심지어 성전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명단까지 기록했습니다. 물론, 성경이니까 성전 중심의 진행, 성전 중심의 사고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코어(core)가 되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서 있던 세월 동안 그 코어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돌아와 성전을 중심으로 잃어버렸던 삶의 기초와 중심을 다시 세우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느헤미야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소중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 12장에서 다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언급하면서 성벽을 봉헌하기 전에 그들 명단을 공개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중심을 이끄는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이 명단들을 읽으며 몇 가지 묵상해야 할 제목들을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나의 이름은 어떤 기억으로 남겨져 있는가?입니다.

긴 명단들은 느헤미야 당시에 말씀 앞에 순종한 사람들로 기억되는 사람들입니다. 지도자들의 이름이 그러하고 제사장이나 레위 가문의 이름들이 그렇습니다. 거룩한 이름입니다. 우리의 이름도 하나님이 아시는 이름이고, 그 분의 기억에 아름답게 새겨져야 할 이름입니다. 잊혀지면 안 되고 지워지면 안 되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이름, 그 분의 생명책에 반드시 기록되는 이름이 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 지금 나의 중심, 코어는 어디인가?입니다.

장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회복한 느헤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들이 되찾아야 할 것을 회복한 것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중심을 두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 중심에 주님이 계시면 단단하게 설 수 있고,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내 안에도 골방을 만들고 내가 머물 수 있는 장소 또는 시간을 성별하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 중심을 잃지 않으시길 기도합니다.


세 번째,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순종할 수 있는가?입니다.

순종이라는 단어를 잊고 살고 있습니다. 무엇에 순종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모릅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묻기 전에 내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입니다. 올 해를 정리하며 이 부분을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내려놓고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순종하면 되겠습니까?’ 순종은 조건 없이 수락해야 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는 추진력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강절, 강림절 또는 대림절이라고도 합니다만, 이 첫 주에 우리는 우리에게 오셔서 구원의 이름이 되시고, 우리의 중심이 되어 주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던 주님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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