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8일 / 대강절 제1주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다

(사도행전 11장 19~26절)

     

     대강절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오늘은 신약성경의 두 번째로 등장하는 안디옥 교회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안디옥은 예루살렘과는 48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수리아(시리아) 지역으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당시에는 아주 큰 도시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나왔다는 것이 기적일만큼 동서양의 문화가 혼합되어 화려하고 자유분방하여 성적으로 방탕한 이 도시에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복음을 받아 들여 열방을 향한 선교를 시작할 수 있는 전진기지로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고,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불리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제자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었는지를 살펴봅니다.

1. 그 곳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이 시작된 예루살렘과는 다소 거리가 먼 안디옥에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이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교회가 세워집니다.  

     초대 초기교회 일곱 집사 중 한 명인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하고, 그 사건을 계기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불린 흩어진 유대인들이 베니게와 구브로, 안디옥까지 가서 이미 그곳에 정착한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합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다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는 복음을 들을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를 믿을 사람도 있었습니다. 복음을 들려주고 그 복음을 듣고 누군가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일은 지금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복음을 전하기가 어려운 때에도 끊임없이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역사는 일어나고 계속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2. 신앙공동체 간의 협력이 있었습니다


     최초로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에 새로운 교회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안디옥으로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안디옥에 도착한 바나바는 안디옥에 있는 사람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며 기뻐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 기뻐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사람들이 그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서로 협력하는 과정이 있었기에 안디옥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설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보내며 안디옥 교회를 더 든든히 세울 수 있도록 협력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와서 교인들과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지켜보며 그들과 함께 있는데 교인들이 더 늘어나며 홀로 감당할 수 없어 도와줄 동역자가 필요했습니다. 그 때 떠오른 사람이 사울입니다. 바나바가 사울과 함께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을 양육하기 시작했고 온화하게 사람을 품는 바나바와 강력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사울이 협력해 사람들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제자들도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그 제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서 부르기 시작하는데, 그들이 항상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모두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만으로 충분한 그 삶을 맛보아야 합니다.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림을 받은 안디옥 교회, 그들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별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 가능했고, 교회가 서로 협력했기 때문에 일어났으며, 서로 동역할 수 있는 동역자들이 있어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도 모두 복음을 전하는 자로, 그리고 서로 동역하고 협력하는 교회와 동역자로 서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11월 21일 / 추수감사주일 &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


진정한 감사는 언제 할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9장 35-38절)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감사’라는 한자어를 살펴보면, ‘느낄 감’에 ‘사례할 사’입니다. ‘느낄 감’이라는 단어를 자세히 보면 ‘다 함’에 ‘마음 심’이 붙어 있습니다. 마음을 다해 느끼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고대의 한자 어원은 전쟁을 앞 둔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창을 들고 입을 모아 힘껏 함성을 지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해 입으로 소리 내어 표현하는 것이 감사하다는 글자의 모습입니다. 추수감사주일에 우리의 입으로 그리고 우리의 손으로 마음을 다하여 다시 한 번 감사합시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9장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감사하며 살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감사는 무엇일까? 마태복음 9장 본문을 살펴보며 감사 생활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길 소망합니다.

1. 진정한 감사는, 복음을 만날 때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의 열 명의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은 이야기를 보면, 고침을 받은 열 명의 나병 환자 중 예수님께로 다시 돌아와 감사를 표현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병이 나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서 공손히 감사합니다. 자신에게 행한 이 치료를 누가 베풀어 주셨는지 정확하게 알고 감사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복음은 복된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하다가 하나님의 자녀의 삶으로 살게 된 복, 그 복을 귀하게 여길수록 감사가 넘칠 수 있지요. 구원의 복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변화의 복, 어둠을 물리치고 빛의 자녀가 되는 밝음의 복까지 다 복음이 주는 결과입니다. 복음을 만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듣고 보고 경험한 복음은 우리 삶을 감사의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감사는 내가 무엇인가를 당연하게 여기는 그 순간부터 없어집니다. 사랑받을 수 없던 자가 사랑받았고, 살 수 없는 자가 살았으며, 받을 수 없는 자가 은혜를 받았으니 감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지요.

2. 진정한 감사는, 긍휼을 경험할 때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시작은 ‘긍휼’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때문에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완수하셨습니다. 주님의 긍휼은 단순히 다른 이들을 불쌍히 여기며 동정하는 수준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영적 필요를 살피고, 육적 필요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음으로, 우리는 날마다 그 주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삽니다. 또 복음을 통해 만난 주님의 긍휼은, 우리가 다른 이들을 긍휼히 여기도록 이어주십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을 일일이 다 돕지는 못하지만 마음의 큰 짐이 되는데 이는 주님이 주신 긍휼 때문입니다. 그들과 비교해 우리에겐 얼마나 감사한 일이 많은지를 깨닫습니다.


3. 진정한 감사는, 사명을 알 때,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추수할 것들은 많은데 정작 이것을 거두어들일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해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하라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이 많다는 뜻은 우리가 아직도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니 감사요, 그 일꾼으로 우리를 부르시니 그것 또한 감사요,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채울 영혼들을 추수할 사람으로 지목하시니 감사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추수할 일꾼’이라는 소명을 확인시키십니다. 우리에게 추수할 일꾼이라는 정확한 소명의식만 있어도 감사는 살아납니다.


     감사를 다시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영혼을 추수해야 할 일꾼’이라는 소명을 다시 확인시킵니다. 우리는 구원 받아 복음을 만난 사람이기 때문에 감사를 잃을 수 없고, 또 감사를 매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미 받은 긍휼이 우리에게도 긍휼한 마음을 품고 살도록 하시며, 우리의 소명을 다시 재확인시키기 때문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하며 감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진정한 감사 예배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11월 14일 / 성령강림 후 제 25주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는 삶

(사도행전 10장 1~16절)

     

     사람은 자신이 보고 관찰하는 대로 그 생각과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에 ‘관점’이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고, 신앙의 세계에서는 더욱 더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고넬료를 만나게 되는 과정을 통해 베드로가 자신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의 관점이 전환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려면 우리의 관점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관점은 무엇이며,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인지,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은 고넬료를 주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군대 장관 고넬료를 주목하시며 베드로와 만나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으로 예수님을 직접 만나 함께 지내며 그 분을 통해 배우고 익혔으며, 이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서 성령을 받고 본격적으로 복음 사역을 감당한 사람입니다. 그는 주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출신으로 유대인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은 로마 출신 이방인 군대장관인 고넬료와 유대인 사도 베드로를 연결시키십니다.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주둔해 있는 군 장교로 가족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며 항상 기도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구제도 많이 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은 환상으로 보여 주시며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베드로와 만나게 하십니다.

2. 하나님은 베드로의 관점을 변화시키십니다


     고넬료에게 환상을 보여 주신 하나님은 베드로에게도 환상으로 말씀하십니다. 환상 중에 하늘에서 온갖 짐승이 담긴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오는데 이는 모두 유대인들이 금기로 먹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베드로에게 잡아 먹으라고 하시고, 베드로는 먹을 수 없다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합니다. 이 환상을 세 번이나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령을 통해 이방인 고넬료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당시 유대법은 이방인과의 교제를 금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공동체에서 추방될 수도 있던 일이었지만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고넬료를 만났고 고넬료와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자신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베드로를 하나님은 그의 생각을 완전히 무너뜨리며 이방인 고넬료와의 만남을 통해 그의 선교적 지평을 넓혀 주십니다.


3. 그렇다면, 하나님의 관점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 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렵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하나님의 관점인지 하나님의 말씀인지 어렵기만 합니다. 그런데 매 순간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나님의 생각과 길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온통 각자 자신의 유익을 구하고, 자신의 기쁨을 구하며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분별해야 합니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가? 나의 관점인가? 하나님의 관점인가? 물어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은 시대를 무조건 무시하고 적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시대를 따라 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맞춰 살지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따르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부터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가는 삶 실천해 보기입니다. 어떤 일을 판단해야 하는 때, 내 판단을 중지하고 하나님은 어떤 마음이실까?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라고 하실까?를 물어 보기 시작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관점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삶의 태도,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는 삶을, 오늘 이 시간부터 시작해 봅시다. 승리하게 되실 것입니다.


2021년 11월 7일 / 성령강림 후 제 24주


바울의 회심과 나

(사도행전 9장 1-19절)

     

     사도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에 대한 말씀을 함께 봅니다. 신학적인 언어로 유대교 율법주의에 견고하게 서 있던 사울이 극적인 변화를 맞이한 후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사건을 ‘회심’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한 순간 변할 수 있을까? 그의 회심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그의 사건과 나, 그리고 우리와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관련이 없는 사건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울의 혁명적인 변화 사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야합니다.

1. 그는 열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후에 변화된 사도 바울입니다. 투철한 유대교 신앙의 사람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으로 유대인을 선택하시며 율법을 주셨고 메시아로 다시 오셔서 세상을 변화시킬 분으로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그에게는 아직 오시지 않은 메시야이기에 십자가 형벌을 받아 비참하게 죽은 예수와 그를 믿는 ‘예수당’들은 용납될 수 없는 이단적인 무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기에 하나님의 일이라면 목숨 걸고 열성적으로 해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에 대해서도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넘기는 일에도 전혀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아주 멀리 도망 간 그리스도인들까지 색출하려던 그의 열심과 열정은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열성적인 종교적 신념은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계기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일상에서 우리의 논리와 선입견과 고집으로 논쟁을 벌이며 서로에게 죽일 듯 달려들 때가 있습니다. 과연 그 열심이 하나님의 의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의인지를 묻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2. 그에게 주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사울이 이렇게 극적인 변화를 맞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의 변화는 일시적, 극단적으로 이루어졌고,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그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이처럼 회심은 주님의 섭리와 계획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친히 이끌어 주셔야 가능합니다.

     진정한 회심은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을 변화시킵니다. 죄 짓는 자신을 애통해 하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자랑하며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던 것을 부끄러워하게 하며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회심의 과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더 깊어집니다. 무엇보다 우리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3. 돕는 자를 붙여 주십니다


     사울의 회심에는 하나님이 붙여 주신 돕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다메섹의 아나니아는 이미 사울에 대한 소문을 들어 그를 만나기를 꺼려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자 그대로 순종하여 사울에게 안수합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 변화에서, 하나님이 하시니 사울은 변했고,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며 다시 앞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사울이 회심하기 전, 그리스도인들을 열성적으로 잡아 고발했던 때의 그 비늘이 벗겨지며 새로운 눈이 띄어졌음을 암시합니다.

     아나니아처럼 먼저 회심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돕고 세워야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여전히 비늘 덮인 채로 종교적인 생활만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내 자신이 거듭난 사람인지, 회심한 사람인지, 영적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인지 살펴보아야 하고, 아나니아가 사울을 도운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도우며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사울이 바울이 된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먼저 나 자신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나는 거듭났는가? 나는 회심하여 지금도 변화하고 있는가?


2021년 10월 31일 / 성령강림 후 제 23주 & 종교개혁주일


히스기야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다

(열왕기하 18장 1~8절)

     

     종교개혁 주일인 오늘, ‘개혁’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500여년이 넘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참되고 바른 신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개혁이 필요한 부분은 없는지 살펴보고 그 길을 가는 것이 오늘 우리의 종교개혁이고 신앙개혁입니다. 특히 오늘은 열왕기하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한 왕으로 알려져 있고, 성경은 다윗 왕같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사람이라고 그를 평가합니다. 종교개혁 주일에 백성들의 믿음을 개혁한 그 왕 히스기야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그를 살펴봅니다.

1. 하나님을 의지 : 결단하고 당장 실행하라


     히스기야 왕은 다윗 왕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정직하게 살았는지를 알고 그 뒤를 좇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걸림이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기로 결단하며 산당들을 제거하고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렸습니다. 출애굽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그 놋뱀을 하나님처럼 섬기며 분향했던 유다 백성들에게 보여 준 결단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 있는 히스기야를 신뢰하고, 히스기야는 용기를 얻어 성전을 정화하고 절기를 회복하고 예배를 회복하며, 예루살렘에는 다시 큰 기쁨이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우리에게 힘이며 복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용기 있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개혁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힘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2. 하나님과의 연합 : 임마누엘을 믿고 당당히 나아가라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룬 일들은 다른 왕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습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더 당당히 싸울 수 있었고 하나님이 대신 싸우시므로 평화로울 수 있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과감하게 행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심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개혁이 아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나라의 지도자이면서 영적인 리더로서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 일을 단행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도 당당하게 나아가게 해주십니다.


3. 하나님의 치료 : 겸손하게 그 길을 가라


     히스기야 왕의 인생에 있었던 큰 어려움 중 하나는 그의 질병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그가 죽을 것이라 통보합니다. 그는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말에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의 눈물을 보셨고 그를 고치셨습니다. 아무리 왕이어도 한 순간 그의 목숨을 거두어 가시면 아무 것도 아님을 알려 주신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후 그가 큰 실수를 합니다. 히스기야의 치유 소식을 듣고 바벨론 왕이 사자들을 통해 편지와 예물을 보냅니다. 히스기야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 사자들에게 보유한 보물과 군기고 등 나라의 모든 것을 다 보여 줍니다. 자신의 국력과 상태를 보여주며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이 다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단호하게 그 모든 것은 히스기야가 이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그것을 어느 날 다 쓸어 가셔서 다른 이들에게 주어도 아무 말도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이 많은 일들을 이루어주셨다면 우리는 겸손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히스기야가 그랬습니다.


     중세의 교회가 사제와 같은 종교권력가들을 중심으로 물질과 권력들을 축적하고 강화하면서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본질과 사명을 망각하고 사람과 사회에 군림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 권력 앞에 일어서서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했습니다.

     종교개혁 주일에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연합하며 하나님의 치료하심 앞에 다시 한 번 일어서서 나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10월 24일 / 성령강림 후 제 22주


스데반의 순교, 영광을 보는 삶

(사도행전 7장 54절 ~ 8장 3절)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 순교하게 된 스데반 이야기입니다. 스데반의 이야기에서 우선은 그의 순교가 현재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느냐에 대한 걸림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시대를 향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 있기를 원하시는 것일까? 스데반의 순교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1. 스데반은 누구입니까?


     스데반은 예루살렘 교회가 세운 일곱 명의 리더 중 한 사람입니다. 열두 사도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데 주력하고, 이들 일곱 명은 그 이외 사역들을 감당합니다. 스데반은 그 중 한 사람으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그에 대해 거짓 증언하여 유대 지도자들을 선동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설교를 통해 아브라함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말씀을 전합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유대 지도자들의 마음에는 찔림이 있었습니다. 회개의 기회가 있었지만 회개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잡아 죽이려합니다.

2. 스데반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스데반은 죽음도 각오하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일곱 명 중 한 사람으로 선택될 때부터 순교를 각오한 사람처럼 담대했습니다. 무고하게 잡혀가서도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보여 주십니다. 순교 직전에 하늘의 열리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핍박 앞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스데반이 끝까지 바라보고 있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믿음이 그의 보는 것을 변화시킵니다.


3. 스데반 이야기를 통해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스데반의 순교를 시작으로 예루살렘 곳곳에 있는 교회들이 박해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박해를 피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박해로 인해 흩어졌지만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이 순교와 박해의 시대는 아니지만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1) 고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는지 묻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약점은 편리함과 안위만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없는 믿음은 없고,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당신의 나라를 유업으로 남겨 주시지만, 그저 기쁘기 만한 영광이 아니라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고난을 심지어 ‘잠시 받는 환난’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고통과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영원한 것을 주목하여 볼 수 있을 때라고 말합니다.

     2)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내다보는 믿음이 있는지 묻습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스데반의 순교는 첫 번째 순교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순교 이후 복음은 전 세계로 퍼지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오히려 박해로 인해 각 지로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스데반 한 사람의 죽음은 그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이 온 인류를 구원할 것에 대해 말씀해 주신 것처럼, 결국 스데반의 죽음도 복음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보여 주신 죽음 그의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사는 인생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은 무엇이며, 죽음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합니다. 진정한 삶은, 한 육체를 입고 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삶이 아닙니다. 이미 태초부터 이 세상을 계획하시고 섭리하셔서 이 세상의 마지막까지 다스리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며 함께 나아가는 삶입니다. 순교로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를 살리신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바라보는 삶이 곧 죽음을 내다보며 죽음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일 것입니다.


2021년 10월 17일 / 성령강림 후 제 21주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사도행전 5장 1~11절)

     

     사도행전의 초기 교회 역사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함께 모이기를 힘썼고, 같이 예배하며 떡을 떼고, 서로 자신의 것을 욕심내지 않고 재산들을 통용하며 신앙 공동체의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교회 안에 많은 기적들도 일어났습니다. 그러는 중에, 구브로 출신 레위족인 바나바라는 요셉이 자신의 밭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 옵니다. 성품도 온화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바나바처럼 자신들도 재산을 바칩니다. 그런데 땅을 판 값의 얼마를 감추게 됩니다. 이 부부가 땅 값의 전부를 드리지 않고 일부만 드린 것은 죄가 아닙니다. 베드로의 말대로 그들이 ‘성령으로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 것’이 이 부부의 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헌금하겠다고 마음 먹었던 그 때에도, 일부를 감출 때에도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람들 앞에 서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사건을 잘 정리해 보아야 합니다. 왜 초기 은혜로운 교회에서 이런 무서운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까?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이렇게 가차 없이 죽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1. 첫째,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하나님이 다스려야 합니다


     초기 교회의 시작은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연합했고 기도했고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한 자리에 모였고, 각각 자신의 소유를 팔아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었고, 함께 떡을 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에 힘썼습니다. 이처럼 신앙 공동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곳이 아닌 성령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신비한 공동체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성령의 다스리심을 벗어날 때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본보기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자신의 뜻과 생각 또는 탐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시켰습니다. 그들의 죄는 근본적으로 성령의 다스림 아래 있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2. 둘째,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앞에 초기 교회 공동체가 두려워했습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한 경외감입니다. 이 두려움은, 사람을 죽이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 그 분 존재 자체에 대한 경외심을 의미합니다. 그 두려움은 경외감이면서 그 분의 다스리심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엄청나게 큰 죄며 우상숭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없는 것처럼 여긴다면 이것은 큰 죄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 발생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죄를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초기 처음 교회 공동체에서 다른 어떤 기적의 사건보다 충격적인 이 사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으로 인해 그들 교회는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고, 죄를 무심히 용납하지 않도록 성령님을 의지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적 정결성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엄위하신 본보기를 보면서,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는 일, 죄를 미워하여 용납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2021년 10월 10일 / 성령강림 후 제 20주


내게 있어야 줄 수 있다

(사도행전 3장 1~10절)

     

     2천여 년 전, 초기 교회 사도들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일은 지금 우리와 단절된 역사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처럼 우리에게도 있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사도행전으로 보는 역사와 사건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로 우리를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물론,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일을 이루신 주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현재’가 되십니다. 우리는 오늘 그 역사를 볼 것입니다.

1. 그에게는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오순절 사건 후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가다 생긴 일입니다. 유대인의 방식에 따라 정시에 기도를 하러 성전으로 오릅니다. 사람들이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한 남자를 성전 미문 앞에 두고 갑니다. 걷지 못하는 남자는 살아갈 방도가 구걸 외에 없었던 사람으로 그에게는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지나가는 베드로와 요한을 동전 몇 푼 보태줄 수 있는 사람으로 바라봅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그를 주목하여 보지만, 주목한 이유는 그 사람과 달랐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건강이 없고 그래서 금과 은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도들은 그에게 없는 것이 ‘금과 은’이 아니라 그를 다시 제대로 살게 할 그 어떤 것이 없음을 알려줍니다.

2. 사도들에게는 있습니다


     구걸하던 사람과는 달리 사도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그 분을 통해 만난 ‘구원의 복음’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걷도록 잡아 일으켰고 그는 서서 걸으며 성전으로 들어가 걷고 뜁니다. 기적이 일어나니 베드로와 요한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 들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들이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을 보지 않고 그 일을 한 메신저인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단호하게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기적을 일으켰다고 고백합니다.


3. 나에게는 있습니까?


      사도들의 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기적에 초점을 맞추는 당시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러 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이름의 권세로 이 일이 일어났다고 강조합니다.부활의 주님을 제대로 만난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이전 베드로와 요한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영원을 살아가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선포로 평생 걸어보지 않은 사람이 낫는 기적을 보아도 자신들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 일을 이루신 하나님을 자랑하며 예수 그 이름을 자랑합니다.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이 사람, 그저 평생 이렇게 살다가 죽나보다 포기하고 체념했던 그를,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이름으로 살려 주었습니다. 그에게도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준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이름이 있습니까? 그 이름 안에서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은 깨지고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새롭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를 만나야 삽니다. 그 사람에게는 없었으나 사도들에게 있어서 줄 수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과 능력, 우리에게는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을 묻습니다.


2021년 10월 3일 / 성령강림 후 제 19주


나의 교회, 나의 어머니여

(사도행전 2장 37~47절)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야가 유대 땅에 오셨는데 사람들은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해 주신 메시야가 이렇게 초라하게 오실 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죽기까지 합니다. 다시 살아나셨다고는 하지만 그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한 곳에 함께 모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던 중에 성령의 거룩한 임재가 그들을 덮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교회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공동체의 사건들이 시작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도행전에서 보여 준 교회는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모체, 어머니 교회가 됩니다.

1. 최초의 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현존에 두려워하며 함께 모이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기사와 표적을 보았고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서로의 필요를 챙겨주며, 모이기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함께 식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다보니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고 그러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집,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합니다. 또한,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부르신 공동체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고백 공동체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모인 사람들이 곧 교회입니다.

2. 최초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교회를 이룬 최초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첫 번째는, 한 자리에 함께 모이는 공동체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이는 일은 로마 당국의 눈을 피해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비밀리에 소규모로 그들만의 모임을 갖기 위해 가정을 교회로 삼았고 자신들의 집을 흔쾌히 예배 장소로 내놓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도하고 함께 식사도 하며, 각각 돌아가서는 예수를 증언하는 전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모이면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유지하고 자신들의 영적 가족인 교회 공동체를 중보하며 기도했습니다.

3. 우리의 교회들이 회복해야 할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오늘날의 교회들이 회복해야 할 사명과 과제는 무엇입니까? 선교하고 교육하고 봉사하고 친교하는 공동체로 나아가야 마땅합니다. 장차 우리교회가 회복해야 할 과제와 사명은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세상에 복음을 전합니다.’


     최초의 교회를 ‘모교회’라고 합니다. 어머니 교회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신앙을 전해 준 어머니 같은 분들은 누구십니까? 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의 첫 번째는 우리가 새롭게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이번 10월에도 온갖 시험을 준비할 우리네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줄 교회, 어머니들이 굽이굽이 흘러 강을 이루어야 합니다. 혼자 질병을 짊어지고 견뎌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를 품고 밤새 울며 배를 문지른 어머니들이 많아야 합니다. 또한 이 시대와 민족을 끌어안고 영적으로 함께 비전을 품을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교회들이 나와야 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전하며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눌 교회들이 더 나와야 할 것입니다.


2021년 9월 26일 / 성령강림 후 제 18주


십일조, 그 의미와 복

(말라기 3장 7-12절)

     

     말라기 말씀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포로에서 돌아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부패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경고하시는 내용입니다. 말라기서에 나오는 여섯 가지 논쟁의 말씀 중 오늘은 회개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십일조와 봉헌물에 관해 말씀하시는 부분을 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십일조의 문제가 걸려 있다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백성에게 기본적으로 묻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중 하나님께서 유독 십일조와 헌물을 언급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말라기서에서 언급하는 십일조의 문제를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도 적용해보고자 합니다.

1. 왜 말라기서에서 십일조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까?


     말라기서에서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를 합니다. 특히 제사장들의 부패와 죄악들에 대해 더욱 강력하게 경고하시고, 백성들에게는 회개를 촉구하시면서 ‘십일조와 봉헌물’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경고를 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해야 돌아가는지를 묻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지 않고 있던 십일조와 헌물의 규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십일조를 강조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릴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돌이켜 멀리 갈 것인가를 결정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서 예배하고 십일조와 다른 봉헌물로 봉헌하며 살던 삶도 변질되고 왜곡되었습니다. 이에 말라기서에서는 하나님 앞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권면과 경고로 ‘십일조와 봉헌물’을 언급합니다.

2. 십일조는 반드시 해야 하는 규례입니까?


     구약시대에 성막과 성전에서 봉사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위해 반드시 해야 했던 십일조, 당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사용해야 했던 십일조. 그리고 신약 초기 교회에서 어려운 교회들을 구제하기 위해 했던 헌금 등 이 모든 것의 본질적 핵심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소득일지라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얻은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은 것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믿음이 그 핵심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규례와 명령으로 또는 율법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법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신앙고백이며 행위인 것입니다.

3. 이제 결단하십시오.


      어려운 시대입니다. 전 세계가 어려우니 국가도, 기업도, 가정도, 교회도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재정적인 어려움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살겠다고 결단할 때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말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살았던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열심히 살아가고 계신 성도 여러분, 이제 결단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인정하고 하나님이 공급해 주셔야 우리가 살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때 비로소 온전한 예배도 드릴 수 있고, 온전한 헌신도 할 수 있으며, 온전한 봉헌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결단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이끄실 것입니다.


2021년 9월 19일 / 성령강림 후 제 17주 & 기독교교육진흥주일


기억하며 감사하라

(스가랴 7장 1-7절)

     

     오늘 본문은 스가랴서 중에서도 금식에 관한 부분입니다. 단순히 금식에 관한 권면에 머물 것이 아니라 스가랴서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애타는 권면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 이 어려운 스가랴서를 통해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귀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기억 1.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이름의 뜻은 ‘여호와가 기억하신다’입니다. 포로로 70여 년을 지내다 고국 땅으로 겨우 돌아와 새로운 시작을 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으며 회복시킬 것을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며 우리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여전히 기억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기억 2.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두 번째 기억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전 재건이 반쯤 진행되었을 때, 한 사절단이 찾아와 이제 성전이 재건되면 지금까지 이어온 금식을 끝내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며, 회복을 소망하며 금식했던 그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전이 재건된다면 굳이 금식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금식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느냐고 이들에게 묻습니다. 성전의 회복을 위해 애통해 하며 소망하며 금식한 유다 백성들이었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누구를 위함이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해 온 금식을 할지 말지를 묻는 말에 하나님이 주신 응답은,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완악하였으니 나도 너희의 말을 듣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밥을 굶는 금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기억하며 삶에서 실천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어떤 종교적 의례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기억 3. 약속을 기억할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약속을 스가랴서에서는 묵시적 환상과 예언의 말씀을 통해 결국 오실 메시야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때에도 믿을 수 있는 어떤 약속이 있다면 견딜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70여년의 포로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유다 백성들에게 이미 오래 전부터 하셨던 약속을 상기시키며 그 약속이 있으니 기다리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려운 시절을 지내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 그것은 즉각적으로 우리의 어려움들이 해결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하신 약속을 믿고 하루하루를 견디며 성장하는 일입니다.
우리를 기억하고 계신 하나님, 그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 우리들, 이 약속을 믿고 다시 일어나고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2021년 9월 12일 / 성령강림 후 제 16주


집을 다시 세우심에 감사

(학개 1장 1-15절)

     

     학개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귀향민들에게 허물어진 성전을 다시 세우라고 하신 ‘성전 재건축’에 대한 말씀으로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 재건에 대한 말씀으로만 읽으면 안 됩니다. 성전을 다시 세우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전하기 원하신다는 것도 알아야합니다. 오늘 말씀의 ‘성전 건축’ 이야기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대로 살게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중 하나입니다.

1. 학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학개서는 총 2장 분량의 짧은 말씀으로 핵심은 ‘성전을 다시 건축하라’입니다. 페르시아 다리오 왕 2년째 되는 해(BC 520년 경)에 하나님께서 학개를 부르셔서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전달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의 핵심은 포로에서 귀환되어 온 지가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성전을 못 짓고 있다는 핀잔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무너져 버려 황폐해져 있는데 그들의 집은 견고한 지붕에 덮여 튼튼합니다. 성전 짓는 일이 어려워지자 먼저 자신들의 살 궁리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우선순위’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오며 하나님은 그들의 신앙을 회복시키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성전을 짓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성전을 다시 짓는다는 것이 그들의 무너진 믿음을 다시 구축하고 잃어버린 삶의 중심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 폐허가 된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 수 있는 성전을 재건하게 하십니다.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임마누엘의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세우시려고 하나님이 학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따라야 합니다.


     학개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게 하신 성전 재건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이었고, 고국으로 백성들을 데리고 오는 책임을 맡았던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몫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학개에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듣고 실행하는 순종의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 많은 어려움도 겪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귀향민들은 자신들의 집을 짓는 것이 먼저였고, 경제적인 부분도 자신의 것을 축적하느라 바빴습니다. 자신들 먼저 살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았고 많이 거두려고 애써도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있는 것까지 하나님이 다 흩어버릴 수도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끄시고 그가 책임지고 있는 삶을 먼저 인정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주시고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그의 다스리심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 매일 매순간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3. 집을 다시 세우심에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집을 다시 세우게 됩니다. 성전을 건축하게 하시기 전,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경외하게 하시며 그 마음에 감동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전을 짓는데 구체적인 묘안을 주시거나 실질적인 필요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임마누엘 하시겠다는 말씀을 주십니다. 또 성전이 다시 세워지는 그 날부터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이심을 알려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이미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주님 안에 우리가 머물고 주님이 우리 안에 머무름으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만나 그 분의 지체가 되고,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교회를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집을 언급하십니다.

     학개서에서 하나님의 집을 다시 세우는 일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결국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집의 재건은, 우리가 거룩한 성전임을 알고 다시 세워지는 일로 마무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소원입니다.


2021년 9월 5일 / 성령강림 후 제 15주


그 사랑에 감사

(스바냐  3장 9~20절)

     

     스바냐서는 총 3장으로 짧지만 대부분이 심판에 대한 예언과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는 소선지서들의 특징이면서 실제 우리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게 하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남 유다 왕이었던 요시야의 통치기간에 주로 활동한 선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원전 7세기, 당시는 앗수르가 점점 쇠퇴해 가고, 신흥 패권국인 바벨론 제국이 등장하기 시작하던 시대였습니다.

     스바냐서에서 강조하는 메시지는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1장과 2장, 3장의 초반까지도 내내 무섭고 두려운 심판의 메시지가 나오다 3장 끝부분에서 아주 밝고 기쁜 노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던 2천여 년전의 상황과 같습니다. 로마 치하에서 나라의 주권과 자유를 잃어버렸던 이스라엘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소망으로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절망의 끝에 찾아오신 소망의 주님이셨습니다.

1. 소망의 노래를 부릅시다.


     오늘의 말씀을 근거로 오늘부터 구원의 노래, 기쁨의 노래, 감사의 노래, 희망과 소망의 노래를 부릅시다.

     어려운 때에도 우리가 웃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진정한 교제에서 우러나올 때입니다. 웃을 일이 없어서 웃지 못한다는 말이 무색하도록 성경은 거듭되는 반전을 보여 줍니다. 지난 주일 하박국서도 그러하였습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힘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이제 노래합시다. 그 노래는, 기쁨의 노래입니다.

     그 기쁨의 근거에, 하나님이 우리 존재로 말미암아 그냥 마냥 기쁘시고 즐겁고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라고 하시며 잠잠히 사랑하신다고 하시는 이 아름다운 고백을 듣고도 우리가 어찌 노래하지 않겠습니까?

2. 하나님의 약속을 믿읍시다.


     하나님은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 당신의 자녀들이 악한 자들에게 모욕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절대로 두고 보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을 흩으시고 처리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악하게 했던 무리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처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칭송을 받게 하고 명예를 회복시키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거룩하신 약속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 약속은 이미 창세전부터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성취하시며 마지막 날까지 그 약속을 의지해서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여전한 죄와 악으로 점철된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셔서 함께 하시겠다고 하시는 영원한 생명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당신의 자녀들을 가장 선하게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그 능력을 믿으시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약속을 믿는 믿음입니다.

3. 서로서로 격려합시다.


     마지막 적용입니다. 서로를 격려하며 삽시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때입니다. 스바냐서의 기본적 메시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있으니 정신 차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깨어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견디어 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스바냐서의 궁극적인 중심 메시지는 하나님의 격려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힘내게 하고 우리를 끌어 올려 격려하십니다.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고백에 다시 힘을 얻습니다.


2021년 8월 29일 / 성령강림 후 제 14주


감사로 반응하십시오

(하박국 3장 16~19절)

     

     8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로 인해 피로감과 우울감을 호소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때 우리가 잊게 되는 언어가 ‘감사’입니다. 하박국 선지자 역시 하박국의 3장 뒷부분에 가서야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1장과 2장에서는 당대 사회의 불의와 고통 앞에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모습에 거침없는 질문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박국 선지자의 아름다운 감사노래가 그려져 있지만 3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하박국의 2장까지 하나님 앞에서 불평을 토로하는 정의로운 하박국 선지자를 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서 왜 세상은 이렇게 여전히 악하고, 악한 사람들은 여전히 악을 행하고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모순 앞에,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인지까지 묻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오히려 바벨론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치시겠다고 하시고 결국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을 이해하며 감사의 고백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경외감’이 하나님 때문에 기쁘고 즐거울 수 있다고 감사를 고백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수준은 결국 ‘감사’로 드러납니다. 감사할 일도 없고, 감사하기도 어려우며, 감사를 잃어버린 채 사는 것 같은 요즘이지만, 성경은 감사할 일이 있어 감사하라고 하지 않고, 먼저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함은 우리 믿음의 삶을 풍성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감사해 하는 것은 관계에 치유도 줍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삶에서 적용해야 하는 감사 생활, 그 말씀을 훈련해 봅시다.


1. 모든 것을 ‘감사’로 받기로, 이제부터 시작합시다.


     이제부터는 어떤 이유, 어떤 상황에서도 “아 감사한 일이네요”라고 해 봅시다. ‘감사’로 대답하는 훈련을 하면 치유가 일어납니다. 여섯 가지가 다 없어도 감사하다고 했던 하박국 선지자는 지금 현실에서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오히려 감사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은 사람으로 구원 받아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가장 잘 아시고 보호하시며 이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보다 더 큰 감사는 없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기로 결정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은 다 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일들에도 모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영적 수준을 높이십시다.


     하박국 선지자는 감사로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힘’이기 때문에 감사한다고 고백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진정한 힘이 되십니다.

     또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이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신다는 뜻은 지금 현실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해 어렵고 힘들어서 내려가고 내려가는 현실인 것 같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발을 가장 높은 곳으로 높이시고 높이실 것이라는 ‘희망’의 고백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 인하여 올리는 감사는 우리를 영적으로 높여 줍니다. 영적인 수준이 올라가면 그 다음에 또다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의 선순환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통해 우리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게 되시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높이고자 할 때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낮아지셔서 우리에게 오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 주시고 관을 씌우시고 원수 앞에서 상을 차려주실 때 비로소 가장 높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럼 연습해 봅시다.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그저 감사입니다!


2021년 8월 22일 / 성령강림 후 제 13주


깨어 있어야 기회를 얻습니다

(나훔 3장 18~19절)

 

     오늘 본문은 쉽게 들어 보지 못한 구약의 소선지서 중 하나인 ‘나훔’입니다. 잠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허락하신 삶의 에너지를 집중해 보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들립니까?


     요나서에서 이스라엘의 적 앗수르의 니느웨까지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나훔서에서는 하나님이 그 앗수르의 니느웨를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태도를 보이시는 이유, 본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기회를 주시며 기다리셨지만, 니느웨의 계속되는 잔인한 악행에 하나님은 그들은 멸하시기로 결정하십니다. 악한 민족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패악을 저지를 때,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고 그들에게 경고하며 말씀하십니다.

     나훔 선지자는 엘고스 사람으로 이름의 뜻은, ‘위로하다’입니다. 앗수르에게 억압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는 선지자로 잔인하고 악한 앗수르를 보며 하나님이 반드시 그들의 패악을 기억하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위로를 주시기 원하셨고, 나훔 선지자의 앗수르 심판 예언은 고난의 삶을 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가장 어려울 때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지금의 고난을 당하라고만 하시는지 아니면 고난을 통해 위로하시며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지 잘 들어야 살아납니다.

2. 본문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앗수르가 남유다를 멸망시킨 강한 나라였지만 하나님은 앗수르를 향한 강력한 심판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1) 강력한 니느웨도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니느웨에게 그동안 강력하다고 자랑했던 나라들도 다 멸망했으니 교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2) 교만한 니느웨는 멸망하여 초라해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교만으로 인한 멸망을 말씀하십니다. 자신들의 권력이 승승장구 영원할 것처럼 생각했던 앗수르 니느웨가 힘을 못 쓸 것이고 도망자 신세가 될 것이며 요새들은 무너지고, 군인들도 힘쓰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문도 열리고 빗장도 풀려 무방비의 성읍이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3) 니느웨가 흩어져서 무능력해질 것을 예언합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다 흩어져서 무능력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강한 나라도 하나님이 흩으시기로 작정하시면 한순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하며 살아야 합니까?

     1)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을 의식하는 훈련을 하십시오

     첫번째, 매일 매순간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삶을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일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기도이고, 기도는 매일 매순간 하나님 앞에 선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자신의 마음조차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2)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하게 쓰시는 하나님을 고백하십시오

     두 번째 적용은 지금 그 자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 설명할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이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일들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나아가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요나 때의 니느웨가 회개를 선택해 성장을 했다면 그 길로 계속 나갔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니느웨는 결국 하나님을 떠났고 나훔의 때에 그들은 끝에 다다릅니다.


     나훔서의 니느웨는 2021년을 사는 우리들을 깨워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아가며 살아야 할지를 물으며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혼란의 시대를 살지만 깨어 있어야 앞으로 나아갈 기회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은, 주춤대거나 주저앉지 않고 지금을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힘내십시다.


2021년 8월 15일 / 성령강림 후 제 12주


그 삶이 믿음을 증명합니다

(미가 6장 1-8절)

     

     지금부터 76년 전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우리나라는 광복의 기쁨을 맞이했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힘과 권력과 패권으로 이어지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아야 할 세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다스리실 것에 대한 희망의 나라입니다.

     오늘의 미가서 본문은 미가 선지자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어떻게 삶에서 구체적으로 서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나라에서 정의를 잃어버린 채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철저히 서민적이고 백성들 가까이 있었던 선지자로 그의 선포는 현실적이면서 비판적이고 예언자적입니다.


1. 미가 선지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미가 선지자는 남 유다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며 주로 시장과 도심에서 사역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선포는 현실적이고 비판적이며 정의로웠습니다. 그의 이름 미가도 “누가 여호와와 같으랴?” 즉 여호와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는 권력가들, 권세자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을 과감하게 비판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갈망했습니다. 그의 선포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그들의 삶에서 믿음으로 구체적으로 살아야 할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주는데 그 삶은 공의와 정의, 선의 삶입니다.


2. 미가 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미가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동시에 언급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죄악을 비껴갈 수 없음을 알려 주시고, 심판에 대한 예언과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선포합니다.

     1)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첫 번째 선포는 심판의 예언입니다.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모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죄악에 대해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 흥왕을 이루었지만 오히려 영적으로는 흔들렸습니다. 배가 부르고 힘이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앗수르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며 그들을 멸망시키십니다.


     2)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과 변론하십니다.

     두 번째 내용에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변론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변론의 형식을 빌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밝히십니다. 미가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얼마나 잘 이끄시려고 하셨는지 변론하게 하십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일일이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을 설득시키시고 이해시키십니다.

 

     3)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미가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줍니다. 하나님 자신을 예배하기 원하시지만, 형식만 남은 제사와 제물을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훌륭한 제물을 준비한다한들 하나님 앞에 삶으로 드리지 않으면 그것을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예배를 드리며 동시에 삶에서 악을 행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미가 선지자를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배만 잘 드리는 교인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예배가 곧 삶이 되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삶을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삶에서 어떤 열매를 맺고 사는지를 반문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루는 공의의 삶, 사랑의 삶, 그리고 겸손의 삶이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온전하게 이루는 열매가 될 것입니다. 믿음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통해 증명해 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정의, 다른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하나님과 늘 겸손히 행하는 일, 바로 이것입니다.


2021년 8월 8일 / 성령강림 후 제 11주


그 사랑, 불가능한 가능성

(요나 4장 1~11절)


     요나서가 전해주는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도 살아남는 요나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힌 앗수르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의 사랑과 자비를 함께 들여다보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은 차원이 다릅니다.


     요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큰 차원의 사랑을 가지고 계신지를 보여 주십니다.
선지자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임했습니다. 앗수르의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음을 알리며 그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버립니다. 유추해 보기는 요나 선지자의 자신의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고 투철해서 결국 그 신념이 결국 하나님까지 이기려고 합니다. 자신의 민족을 향한 요나 선지자의 사랑이 각별하지만 이 사랑도 하나님의 뜻에 맞춰 봐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난 요나는, 깊은 바다에 빠져야 했고, 죽을 뻔한 그를 하나님은 다시 기적처럼 살려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을 주시며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이 니느웨에 대한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게 하시는 것도 큰 사랑이지만, 지금 요나 선지자를 기다려 주시며 다시 세우시는 것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를 향한 마음도 하나님의 사랑이요 니느웨를 구원하시려는 마음도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선지자인 요나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 원하는 법을 고집하며 하나님의 명령도 어겼습니다. 그의 민족사랑이 편협한 율법에 의지하고 관습적인 사랑의 깊이를 가졌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의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측하기 어려운 깊고 넓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측정할 수 없는 사랑의 스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다가 깊은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합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돌아보게 하신 후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얼마나 악한 지 하나님의 은혜를 그새 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은 하지만 니느웨에 대한 애타는 마음도 없고,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은 해야겠기에 아주 짧고 간결하게 선포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나의 짧은 외침을 듣는 니느웨 백성의 반응입니다. 그 짧은 선포를 백성들이 듣고는 금식을 선포합니다. 모두가 동참하며 굵은 베옷을 입습니다. 니느웨의 왕도 보좌에서 일어나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습니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서 온 니느웨에 선포하여 짐승과 가축까지도 모두 금식을 시킵니다. 여러 신을 믿는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요나를 살려주시는 하나님, 요나를 살리신 후 같은 명령을 다시 주시는 하나님, 여전히 심통 부리는 요나에게 박 넝쿨로 그늘을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요나 같은 융통성 없고 고집불통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앗수르와 같은 사람이 있거든,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마음으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그 사랑은,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그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사람을 구하시려고 하늘 보좌를 버리셨고, 사람을 사랑하시니 사람이 되셨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왕의 신분까지도 포기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던 때에 이미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시므로 우리를 대속하게 하셔서 하나님 당신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증명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8월 1일 / 성령강림 후 제 10주


나는 야곱입니다

(오바댜 1장 10-21절)


     오바댜서는 이스라엘의 형제라 할 수 있는 에돔 족속과의 관계와 그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으로, 에서는 야곱의 쌍둥이 형으로 아주 가까운 형제 관계입니다. 그런데 에돔이 유다를 배반합니다. 이스라엘을 돕지 않고 바벨론과 한 패가 되어 형제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이에 하나님은 오바댜 선지자를 통해 확실하게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말씀하십니다.

1. 하나님은 에돔의 죄악을 보셨습니다.


     성경 중 가장 짧은 말씀인 오바댜서는 총 21절로,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오바댜 선지자를 통해 에돔의 죄악을 보셨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들의 죄악은 교만이었고 자신의 형제 이스라엘에게 행한 포학이었습니다. 형제일지라도 그럴 수 있습니다. 가까운 관계라도 이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연약하고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모두 보고 계셨습니다. 에돔의 죄악을 지켜보고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도 살펴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죄악에 대한 값을 치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에돔의 죄악을 낱낱이 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인내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에 대해 오바댜를 통해 예언하십니다.
하나님은 에돔을 벌하겠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만국, 온 세상을 벌할 날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게 하시며 죄의 행위를 한 자들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셨습니다. 에돔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과 온 세상이 다 그 일에 예외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모든 이들이 구원을 받아야 하고 또 모든 이들이 심판에서 예외일 수 없다고 하시는 말씀이고, 구원 받은 이후의 삶에서도 믿음의 행위로 온전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래서 이미 구원 받았다고 해도 우리의 행위를 날마다 들여다보는 일은 중요합니다.

3.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께 속한 나라를 회복시키십니다.

     에돔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신 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 대한 회복을 예언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회복하게 하시고 나아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어 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전 우주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지난 호세아 설교 때에도, 누가 호세아이며 누가 고멜인가 심각하게 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에돔은 심판하시고, 야곱과 요셉은 살려 주시며 회복하신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우리는 야곱입니까? 에서입니까?
     야곱은 하나님의 자녀를 뜻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며 하나님의 상속자로 살게 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상속자가 되게 하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도 받게 하셨지만 고난도 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에서는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여 물어 봅시다. 나는 야곱입니까? 에서입니까? 영적으로 야곱이 되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더 구체적으로 물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나는 야곱의 후손, 아브라함의 후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021년 7월 25일 / 성령강림 후 제 9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아모스 5장 18~27절)


     성경에는 핵심 메시지가 있습니다. 두 단어로 집약한다면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냅니다. 오늘 아모스서 말씀으로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선택적 정의, 자기중심적 사랑을 진정한 의미의 공의와 사랑으로 이해하려는 요즘의 시대적 분위기와는 다른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 보려고 합니다.

1. 아모스 선지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아모스 선지자를 ‘정의의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남유다 사람이지만 북이스라엘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당시 북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들에게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어떻게 실행되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사랑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2.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전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이스라엘 주변 여덟 개의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 선포였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해서만 예언을 해도 될 텐데 굳이 주변국까지 심판을 예언하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온 우주를 심판하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대한 심판 예언과 함께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도 간과하지 않으실 것을 경고하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나라 백성인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남 유다의 율법을 멸시하고 지키지 않는 죄와 거짓에 미혹되는 죄를 지적하시고, 북 이스라엘의 불의와 불공정을 죄로 지적하십니다. 보호받아야 할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필 의무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공의였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고, 북이스라엘의 권력층들이 사회적으로 죄악을 저지르고 종교적으로도 불의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신랄하게 그들의 행위에 대해 심판을 예언하게 하십니다.

     세 번째, 이들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적으로도 부패하고 불의한 것을 지적하시며 심판을 예언하시고 경고하셨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제물과 십일조, 감사 제물을 드려도 하나님은 안 받으시겠다며 종교적 행위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을 제대로 찾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버린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는 받지도 않을 것이고 또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흐르지 않으면 아무리 예배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받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3.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살아갑니다. 두 세계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고도 잘 살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다른 이들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물질과 시간을 쓰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물처럼 강처럼 흐르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지금도 공의와 정의의 강이 흘러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흐르고 흘러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7월 18일 / 성령강림 후 제 8주


내게로 돌아오라

(요엘 2장 12~17절)


     제자를 세우는 일은 교회의 사명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제자로 세워져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야 합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며, 이루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요엘 2장 말씀으로 그 답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십니다. 핵심은 ‘여호와께로 돌아오라’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가던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로, 마음이 향하는 방향을 말합니다. 장소가 아니라 방향이지요.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는 ‘이제라도’ 돌아오라고 하시면서 심판의 날,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지금이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돌아오는 것은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에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의 본래의 뜻이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방향을 가던 길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방향을 트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길이 생명의 길이요. 예수님을 만나서 삶을 찾는 길입니다.

2. 하나님께 돌아오는 ‘회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정한 회개는, 다른 이들과 상관이 없습니다. 다른 이들이 어떤 죄를 지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죄인인지가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통감하고 예민하게 자신의 죄성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할수록 진정한 회개가 가능해 집니다. 진정한 회개로 평강과 풍성과 자유의 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3. 공동체의 회개까지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구약성경은 공동체의 결단과 함께 예배를 회복하는 일에 집중하며 공동체로 마무리되어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공동체적 의미를 갖습니다. 구약의 아브라함은 한 개인이 아닌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의미하고, 모세도 출애굽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개인적인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결국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회개는 지극히 개인적인 깊은 애통에서 비롯되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함께 모여서 해야 하는 공동체적인 회개가 예배를 통해 이루어질 때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시고 일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이 공동체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가정과 사회, 나라와 세계 등 우리의 기도가 점점 그 넓이와 깊이를 더해 가야 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살 수 있다고 호소합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며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하나님을 향해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갇혀 계신 종교적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살려주시는 생명이시고 우리를 존재하게 하시는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궁극적으로 심판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때를 삽니다. 그래도 방향을 잃지 말고 힘을 냅시다.


2021년 7월 11일 / 성령강림 후 제 7주


나는 결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호세아 11장 1-11절)


     ‘멘탈리티(mentality)’는 사람의 태도나 사고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문제 상황을 대처하는 그 사람의 태도와 문제 상황을 해석하는 사고방식들이 멘탈리티를 드러냅니다. 건강하고 행복할 때는 상관없지만 스트레스 상황이 되면 멘탈리티에 따라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집니다. 그순간 어려운 문제 자체보다 그 문제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그 반응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모른다는 것이 또 문제입니다. 그 때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 사랑을 삶의 에너지로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 호세아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만나기 원합니다.

1. 고멜은 누구인가?


     호세아에 등장하는 ‘고멜’이라는 한 여인을 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고멜과 결혼하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십니다. 고멜은 음란한 여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에는 목적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알기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합니다.

     고멜은 가정을 이루어 정착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여인을 끝까지 용납하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고멜을 통해 당시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 바알을 섬기며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이스라엘 백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제 용서해 줄 테니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2. 그 사랑을 아는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크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는 줄도 모르는 고멜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도 이스라엘이나 고멜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에는 포기가 없습니다. 우리를 끝까지 붙들고 계십니다.

3. 그 사랑을 어떻게 받고 있는가?


     고멜은 남편 호세아의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고멜 같은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고 알고 있습니까?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을 믿고 산다고 하면서도 그 받은 사랑을 자주 잊고 삽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폄하할 수 없는 깊이와 너비와 높이와 길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떼어놓을 수 없게 하고, 영원으로 이끌며 생명을 주어 살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 사랑을 몰라 거절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우리 역시 고멜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받은 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받은 것을 알고 감사하며 누리고 있습니까? 여전히 잘 몰라서 하나님과 떨어져 헤매고 있습니까? 빨리 돌아 오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살려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 사랑, 이미 받았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7월 4일 / 성령강림 후 제 6주, 맥추감사주일


맥추절을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

(출애굽기 23장 14-19절)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이스라엘 3대 절기인 유월절(무교절)과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수장절)의 핵심에는 ‘감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때를 따라 절기를 지키도록 하시면서 감사의 예배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역할과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율법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가르치셨고, 이를 위해 지키도록 한 것이 절기입니다. 이 절기들을 오늘에 적용할 때에는 성경적 의미와 함께 현대적인 재해석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맥추감사절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런 중요한 절기들을 상기시키며 감사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감사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특히 맥추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1. 감사 훈련 : 절기를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첫 수확의 맥추감사절을 통해, 감사하며 사는 삶을 기억하게 하며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를 기억하며 절기를 지키므로 감사의 삶을 살도록 훈련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는 절기는 그 때 그 시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지키는 행위가 중요합니다. 그 행위는 하나님께 하는 예배 행위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지키라고 말합니다.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이제 그 수확물의 첫 것을 드리는 일을 하게 하므로,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고 훈련시키느라 매 해 반복합니다.
     감사 절기를 통해 우리도 삶에 대한 태도를 ‘감사’로 훈련할 수 있습니다. 저절로 감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감사를 훈련해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 삶에 큰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2. 감사 예물 : 수고하여 얻은 것 중 가장 좋을 것을 드립니다

     맥추감사절을 통해 우리는 절기를 지키며 감사 예물을 준비하는 예배자의 태도에 대해 배웁니다. 하나님께 감사 예물을 준비할 때, 우리가 수고하여 얻은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일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것을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첫 수확물 중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은 중요합니다. ‘가장 좋은 것’을 드린다는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수고하여 얻었다고 해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얻게 하신 수확물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도 중요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되면 우리가 드리는 제물도 기쁘신 제물이 됩니다. 드리는 사람과 함께 받으시는 것이 제물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제물로만 여기면 안 됩니다. 그 제물 안에 그 사람의 정성과 사랑과 존경이 들어가는 것으로 봅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에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최선을 다해 우리의 감사를 표현하는 태도를 배우게 되길 바랍니다.

3. 감사 나눔 :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감사 절기는 반복적으로 기억하고 지켜야 하는 절기이면서 어려운 이웃들을 기억하여 함께 즐거워하는 축제의 절기입니다.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으로 모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이웃들과 함께 서서 즐거운 감사 예배를 드리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함께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웃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 서서 하나님 앞에서 함께 즐거워하라는 뜻입니다.
     절기 예배는 매년 반복합니다. 내년 이 때가 되면 또 감사절을 지키자고 다짐할 것이며 권면할 것입니다. 감사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 앞에 서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시간이며, 감사를 받을 분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아는 자들의 잔치였고 예배였습니다. 우리도 이 감사 절기를 맞이하면서, 감사를 떠올리며 훈련하고 작정하고 반복하는 감사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맥추감사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훈련을 하게 하시며, 감사 예물을 통해 감사의 고백을 하기 원하시고, 감사 예배를 통해 이웃들과 감사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감사와 감격이 솟아나는 한 주간이 되시고 7월 한 달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6월 27일 / 성령강림 후 제 5주


내 안에 '삭개오' 있다

(누가복음 19:1-10)


     삭개오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보려고 제목을 “내 안에 삭개오 있다”라고 붙여 보았습니다. 누가복음에만 나와 있는 이 삭개오 이야기를 읽으면서 심리적으로, 관계적으로, 영적으로 우리 안에 ‘삭개오’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1. 예수께서 삭개오를 만나신 이유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말씀을 하신 후, 19장에서 부자 삭개오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예수님이 여리고를 반드시 지날 이유는 없었지만 여리고로 들어가십니다. 어쩌다 여리고에 가서 우연히 삭개오를 만난 것이 아니고, 여리고에 가면 ‘삭개오’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삭개오를 만나시는 예수님의 관심은 그가 얼마나 키가 작든,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 세리장이든 상관이 없이 오직 삭개오가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삭개오를 만나십니다.

2. 우리 안에도 ‘삭개오’가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별개의 존재로 ‘삭개오’를 만나기도 하지만,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삭개오’도 들여다 볼 수도 있습니다.

     1) 그 첫 번째 삭개오는,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탐욕’입니다.
     그는 부자 세리장으로 가난한 백성들을 괴롭혀서 자신의 부를 축적하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의 이름이 ‘의로운 사람’인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도 있는 이중적인 삶의 태도를 봅니다. 저런 나쁜 부자가 있나 싶지만 우리 안에도 삭개오가 있습니다. 더 많은 유익을 얻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탐욕이 있습니다.

     2) 두 번째 삭개오는, 우리 안에서 놀라운 영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영적 호기심입니다.
     삭개오는 예수께서 자신의 동네를 지나실 것이라는 소문을 듣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고 키가 작아 볼 수 없어 나무에 오릅니다. 삭개오가 만일 이런 영적 호기심을 갖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삭개오처럼 영적 호기심을 갖고 체면 차리지 말고 나무 위로 오르셔야 합니다.

     3) 세 번째 삭개오는, 영적 결단을 즉각적으로 하는 태도로서 삶에 구체적인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를 오르는 삭개오를 예수님께서 발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속히 내려오라고 하시니 삭개오도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신 후, 자신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스스로 결단과 고백을 합니다. 18장에 등장하는 부자 관리와는 대조를 이룹니다. 이런 결단과 고백은 우리의 삶의 변혁을 만들 만한 거대한 분을 만날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3.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집중하실 때, 수많은 군중도 함께 있었습니다. 이들은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판단하며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태도에는 전혀 관심 갖지 않으십니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고 결단하는 삭개오를 바라보시며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의 집에 예수님이 들어가시며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집에도 주님이 오시면 구원이 이릅니다. 삭개오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잃어버린 자’는 구원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구원받아야할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모신 후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 이렇게 변화된 삭개오가 각인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언제든지 예수님이 오시면 아멘하고 환영하고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2021년 6월 20일 / 성령강림 후 제 4주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

(누가복음 18:18-30)


     오늘 누가복음 본문의 이야기에 한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성경에서 관리들은 주로 예수님을 대적하거나 반대하던 사람들인데 뜻밖에도 이 관리는 예수님을 찾아와 무엇을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1. 그는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그는 아쉬운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회적 지위도 있고, 경제적인 부요함도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 예수님께 무엇을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라는 영적인 질문을 합니다. 그는 어떤 행위를 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물었습니다.

2. 예수님의 대답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그 관리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동문서답하십니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는 질문에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행위에 초점 맞춘 관리의 물음에, 예수님은 ‘네가 선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며 행위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선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얻고 싶은 영원한 생명은 무엇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임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고 나서 계명을 잘 지켰는지를 물으십니다. 이에 그 사람은 어려서부터 그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신 있게 고백합니다.

3. 예수님은 왜 이렇게 요구하셨을까요?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켰다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말씀하시며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요구하십니다. 이 말씀에 그는 근심하였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을 기대하고 예수님 앞에 왔으나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서 나눠주라는 말에 근심하고 결국 돌아갑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이렇게 요구하신 것은,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일이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면 하나님의 자녀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 행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명을 지키고 재산을 팔아 나눠주라고 하신 명령은 선한 행위를 강조한 말씀이 아닙니다. 영생에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그 마음은 자신의 재물에 가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 팔아서 나눠주라’고 하셨고 그렇게 할 수 없음도 아셨습니다.
     여기서 깨달음 하나를 얻습니다. 여러분에게 전부가 되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전부인 것처럼 지키고 있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부족한 한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거 다 팔아 나눠주고 나를 따를 수 있겠니?’ 오늘 이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왔지만, 재물은 그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전부였습니다. 결국 그 전부를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부름에 불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초점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대비시키는 말씀입니다. 나에게 전부인 그것을 놓고,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하고 사는 삶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겐 늘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더 가지려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는 욕심을 내려놓으십시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거든, 이제는 그것을 정리해야 할 때 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살펴보시고, 가장 가까운 공동체 내에서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전부이지만 하나님께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지를 하나님께 묻고 정리해 가는 한 주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6월 13일 / 성령강림 후 제 3주


묶인 것으로부터 자유하라

(누가복음 8:26-39)


     복음서를 읽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길을 찾은 사람들 이야기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내가 길을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살 길을 찾게 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많은 귀신들에게 사로 잡혀 자유가 없던 한 사람이 참된 자유를 얻고 회복되는 이야기입니다.

1. 그를 묶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가십니다. 유대지역을 떠나 이방인의 땅에 들어가셨는데 거기에서 귀신 들린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를 소유하고 있는 귀신들이 군대를 이룰 만큼 많았습니다. 자신이 원한 결과가 아니었지만 빠져 나올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묶여 있는’ 상태입니다.
     현대인들도 이와 비슷하게 내 의지와 상관 없이 묶여 있는 억압적인 환경, 지배적인 환경이 아주 많습니다. 힘으로 상징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요즘의 사람들을 억압하고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지금 억압하거나 묶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2. 그 묶은 것이 어떻게 풀어졌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그 귀신 들린 사람을 사로 잡고 있던 귀신들을 다 내쫓습니다. 그를 묶고 있던 것들이 모두 풀어졌습니다. 어떻게 풀어졌습니까? 귀신들에 의해 묶여 있던 한 사람이 스스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어서 집을 떠나 죽은 사람들이 묻힌 무덤 사이에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자 묶여 있던 것들이 그에게서 다 끊어졌습니다. 귀신들이 예수님 앞에 굴복한 이유는, 그들보다 예수님이 더 강하고 센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여러분을 묶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과거에 얻은 상처들이 여전히 여러분들의 삶을 묶고 있을 수도 있고, 현재의 삶을 지배적으로 이끄는 그 무엇이 여러분을 자유롭지 못하게 묶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성격과 환경도 우리를 묶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묶인 것은 어떻게 풀 수 있습니까? 그들보다 더 강력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풀 수 있습니다.

3. 묶은 것이 풀려야 전할 수 있습니다.


     그 묶은 것이 풀어져야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귀신들로 인해 자유롭지 못했던 이 사람이 예수님께서 풀어주시니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게도 귀신들을 내쫓으시는 장면을 직접 본 사람들과 이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문제도 고쳐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들을 떠나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큰 일에 대한 경외감보다 또다시 이런 일이 생겨 큰 손해를 볼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크신 계획을 보지 못하니 예수님도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고 그 곳을 떠나십니다.

     우리는 오늘, 귀신들에게 사로잡혀 묶여 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를 묶고 있는 것은 없는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풀어 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은 우리를 묶고 있는 것에서 우리를 풀어서 자유롭게 해주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말씀대로 진리는 우리를 반드시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여전한 코로나 상황, 다른 어떤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6월 6일 / 성령강림 후 제 2주


그의 사랑이 많음이라

(누가복음 7:36-50)


     성경에서는 한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거나 새로운 출발을 하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을 만나는 그 시간을 ‘카이로스’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오늘 이야기에서도 한 여인이 예수님을 통해 ‘카이로스’의 삶을 경험합니다. 그 시간 그 현장에 다른 많은 사람들도 함께 있었지만 모든 이들이 그 순간을 결정적인 시간으로 만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사람, 이름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은 여인만이 새 출발을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나게 되는 복을 누립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같은 현장에 있었지만 둘의 경험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 두 사람의 시선을 함께 비교해 봅니다.

1. 오늘 이야기의 배경 : 그곳에 예수께서 계셨다

     한 바리새인이 자신의 집으로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예수님도 그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그의 초청이 예수님께 호의적인 태도였는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거나 존경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초대 받지 않은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 동네에서 ‘죄지은 여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으로 예수님이 그 바리새인의 집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용기를 내 찾아왔습니다. 이 여인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로 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이 장면을 바리새인 시몬이 지켜보며 예수가 선지자라면 이 여인이 죄인인 것을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속마음을 예수님께 들키게 됩니다.

2. 같은 장소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 : 바리새인과 여인

     바리새인 시몬과 여인이 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각각 다른 의미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과 여인의 시선, 바리새인 시몬과 여인의 태도는 서로 달랐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초청은 했지만 그 시선은 다른 데 있었고, 여인은 예수님께로 고정합니다. 시몬은 곁에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무시했지만, 여인은 예수님 뒤에 가서 가만히 발에 입 맞추고 그 발아래에 엎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시몬의 마음과 여인의 마음을 모두 읽으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몬에게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시몬 자신도 죄인이어서 다른 죄인을 정죄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며 모두가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3. 하나님의 은혜 : 자신의 죄를 영적으로 보는 일에 비례한다.


     핵심은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에 들어 있습니다. 비유에서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와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모두 주인에게 탕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누가 더 감사하겠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고 묻습니다.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더 많이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이 맞다고 하시며 여인은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 같은 사람으로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여인의 죄를 정죄하면서도 자신의 죄는 들여다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지를 잘 알아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죄의 비참함의 깊이를 알면 알수록 회개하면 할수록 더 큰 은혜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자신의 죄를 영적으로 얼마나 들여다 볼 수 있는지 그 깊이에 비례합니다.

     오늘 우리는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아 가신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만나러 온 한 여인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1) 우리 삶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실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곳에 계신가 물어야 합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결정적 순간은 세상에 속한 일일 뿐입니다.
     2) 매일 매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우리 삶을 흘러가는 시간에 두지 말고 주님이 일하시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아야 합니다.
     3) 완벽하지 않은 우리의 삶,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날마다 우리 자신의 깊은 곳까지 들여다 더 많이 회개하고 더 많이 사랑받으시길 바랍니다.


2021년 5월 30일 / 성령강림 후 제 1주


이만한 믿음 (such great faith)

(누가복음 7:1~10)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부하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백부장은 당시 로마 치하의 이스라엘에서 로마군 100명을 부하로 거느린 중요한 지휘관입니다. 권력도 있었습니다. 그런 백부장이 부하의 병 때문에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는 이방인이면서 유대인을 사랑했고 회당까지 지어 줄 정도로 관대했던 훌륭한 지휘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백부장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십니다. 그의 믿음이 어떻길래 예수님이 칭찬을 하셨을까? 오늘 본문을 통해 두 가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1. 믿음은 ‘무엇을 듣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합니다.(롬10:17) 듣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씀이면서 ‘무엇을 듣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듣는 내용은 그리스도의 말씀이고, 구체적으로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것보다 어떤 일을 하셨고 나에게 어떤 일을 해 주실 수 있는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백성에게 말씀을 들려주십니다.(1절) 유대인 장로들이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3절) 그리고 예수님이 백부장이 한 이야기를 듣고 놀라시면서 칭찬을 하십니다.(9절) 이 부분에서 서로 ‘듣는 것이 다르다’는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들은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아닌 예수님이 행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듣고, 누구를 듣고 있습니까? 우리 믿음은 어디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어떤 존재를 믿고 있는 것입니까? 그 존재가 우리에게 베풀 기적을, 또는 선물을 기대하며 믿는 것은 아닙니까?

2. 믿음은 ‘누구에게 순종할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은 누구에게 순종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급히 친구들을 보냅니다. 그 친구들이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백부장의 말을 그대로 전합니다. 그의 지위나 능력이나 권력으로는 이럴 수 없음에도 그는 예수님 앞에 완전히 엎드려 복종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낮추며 자신이 종에게 명령하면 종들이 순종하는 것처럼, 자신도 예수님이 말씀으로 명령하시면 그대로 하겠다고 합니다. 이 믿음이 ‘주님께 순복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백부장의 말을 듣고 감탄하시고 탄복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감탄할 만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집중하라는 말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그분의 존재 아래에 겸손히 무릎을 꿇으라는 뜻입니다. 나를 굴복하게 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의 주님이시고, 주님께만 순종하겠습니다. 이것이 백부장의 믿음이었습니다. 권력자이면서도 예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로 자신을 완전히 낮추어 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은 그가 누구에게 순종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의 믿음은 누구에게 순종하는 믿음인가?’를 묻게 됩니다.

3.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우며 무엇을 구해야 하며 어떻게 살면 되는 것입니까?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하실 정도의 칭찬을 받은 백부장처럼, 그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구해야 하지만, 지금의 우리 삶에 직접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문장으로 이렇습니다. ‘주님을 찾으라 그리고 그에게 순종하라! 주님을 만나라 그리고 그에게 순복하라!’ 이 일은 매일 매 순간 매시간 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진짜 기적은 주님의 존재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는, 기도할 때, 예배할 때, 우리 주 예수님만 구하면 됩니다.

     주님, 제게 필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만 구합니다. 주님을 먼저 구합니다. 주님을 찾으면 다 찾은 것이요. 주님을 얻으면 다 얻는 것입니다.


2021년 5월 23일 / 성령강림절 & 웨슬리회심기념주일


기다리는 자에게 오셨다

(사도행전 2장 1-13절)


 

     그리스도인에게 성탄절과 부활절, 맥추절과 추수감사절은 중요한 절기입니다. 그리고 또 기억해야할 절기로 성령강림절이 있는데 바로 오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 주셨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 대신 죽으셨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복음을 알려 주시고, 예수님은 다시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시며 우리를 홀로 두시지 않으시고 영원히 함께 할 성령 하나님을 보내 주십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절기가 성령강림절입니다. 이 절기는 첫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둘째 성령께서 오셔서 믿는 자들이 함께 교회를 이루도록 이끄셨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성령강림절을 시작하며 우리가 기억할 몇 가지를 봅니다.

1. 성령강림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성령강림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기로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은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약속대로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대로 본다면, 성령께서는 홀연히 하늘에서부터 오셨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를 내셨고, 120명 넘게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 그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각자 자신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오신 성령은 무엇이고 누구인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성령은 어떤 에너지나 능력이나 힘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인격적인 존재라는 뜻은 우리와 소통을 하시며, 함께 하시며 이끄시고 가르치시고, 때로는 우리로 인해 애통해 하시기도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3. 성령이 임하면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하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그 첫 번째는 성령이 임한 제자들이 각기 다른 나라의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소위 ‘방언’이라고 하는 다른 언어들을 말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물론 성령충만의 결과에 ‘방언’이 필수적인 현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힘이 아닌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을 했다는 것이 더 중요한 핵심입니다.
     두 번째로 더 큰 역사는, 복음 전파의 능력이 드러나는 일입니다. 성령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싶어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마음을 쏟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사는 일,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4.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면 됩니까? ‘성령의 내주하심을 믿고 그 분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야 합니다.’ 구원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시고 우리 가운데 살게 되시니 우리는 이제 그분의 인격과 능력을 힘입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아가 얼마나 강한지 여전히 우리 마음대로 합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까지 조종하며 삽니다.

     어떻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을까요? 다른 것으로 충만한 게 아니라 하나님 그분으로 충만해야합니다. 그러면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약속대로 오신 성령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 계시며 영원히 우리를 떠나시지 않으십니다. 그 분이 인도하심을 날마다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5월 16일 / 부활절 제7주 & 청년주일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마가복음 9장 14-29절)


 

     산 위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신비한 일을 체험합니다. 반면 산 아래에서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산 위의 상황과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산 아래의 광경이 사뭇 다름을 봅니다.

     산 아래에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세 명의 제자들을 제외한 9명의 제자들이 남았습니다. 마침 아픈 아이를 데리고 온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간청하지만 제자들이 그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고 그 가운데 있던 서기관들이 제자들과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녔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고, 예수님이 하신 일도 직접 목격했고 체험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모릅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그들을 제자로 선택하시고 전도하러 내보내실 때부터 병을 고치는 치유 은사와 귀신을 내쫓는 은사를 주셨지만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이 크지 않아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아픈 아이를 데려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다면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달라며 다소 소극적으로 요청을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그의 절망과 아들을 향한 안타까움 그리고 사랑을 봅니다. 오랜 기간 앓으며 수많은 실패를 맛보았으니 조심스러운 것도 이해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잘 들여다보면, 치유의 이야기나 축귀와 축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너희는 믿음이 있느냐?’에 대한 물음입니다. 예수님이 아이의 아버지에게 물은 믿음은 무엇입니까?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다고 신뢰하는 믿음입니까? 이야기의 결론이 아이에게서 귀신이 나가고 깨끗하게 나았다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 믿음에 대해서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드러나는 어느 현상에 대한 믿음이 아닌, 대상에 대한 믿음이고, 그 대상으로 말미암아 일을 이루시는 것에 대한 믿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단순히 병이 낫고 귀신이 나가기를 바라는 기도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우리가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모든 상황을 바라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후 제자들이 예수님께 조용히 묻습니다. 왜 우리는 그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까? 예수님이 ‘기도 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하십니다. 믿음과 기도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믿음 없이는 기도할 수 없고, 믿음 없이 기도하는 것은 주문을 외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기대하는 사람만이 믿음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있는 사람만이 기도합니다. 기도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화하는 영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은혜의 방편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믿음이 있습니까? 믿음이 없는 이 세대 앞에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았고 내 삶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며, 이 세상도 하나님이 이끄심을 믿습니다’라는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믿음이 있어야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더욱이 믿음을 갖고 같이 기도해야 할 사람들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2021년 5월 9일 / 부활절 제6주 & 어버이주일


어버이 그 사랑

(마가복음 7장 24-30절)


 

     어버이 주일입니다. 마가복음 7장의 오늘 본문을 통해 함께 나눌 말씀이 초점은 좀 다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입니다. 귀신에 들린 딸이 있는 한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어머니는 딸을 고치기 위해 온갖 방법은 다 써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고, 딸을 고칠 수만 있다면 못할 일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보는 딸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1자녀를 위한 적극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 일행은 두로 지방으로 가셔서 다른 이들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쉬고 계실 때,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한 여인이 찾아옵니다. 이 여인은 헬라인에 수로보니게 족속인 이방 사람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립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이 여인의 적극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고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못할까 하는 부모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찾아와 무릎을 꿇은 이 여인을 보며 생각해봅니다. 다른 부모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다면 예수님께 어떤 소원을 말할까? 여러분은 어떤 소원이 있으십니까? 자라나고 있는 어린 아이들에게 바라고 계신 소망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자라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이 어머니의 적극적인 사랑을 보며, 아이들이 주님을 만나게 되는 일이야말로 한 아이가 인격적으로도 잘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2. 자녀를 위해 모욕까지 견딜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 올 때, 이 분을 만나서 내 딸을 반드시 고치겠다는 마음과 고쳐 주실 것이라 믿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무릎까지 꿇은 이 여인에게 야멸차게 말씀하십니다.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참아냅니다. 모멸감을 참아 내는 이유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딸을 고치겠다는 마음을 가진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딸이 건강할 수만 있다면 이 정도의 비난과 모욕은 견딜 수 있다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합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참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따가운 시선도 참을 수 있고, 인격적인 모독도 참아 낼 수 있습니다. 모멸감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위한 일이라면 목숨도 걸 수 있는 것이 부모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여인의 고백을 듣고 예수님이 그의 딸을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모진 말을 듣고도 간절히 자신의 소원을 드러내며 견뎌낼 수 있었던 그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보셨습니다. 직접 가셔서 딸을 보지 않으시고도 말씀으로 고치셨고,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때로부터 아이가 나았다고 전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옛날이야기로만 읽으면 안 됩니다. 딸을 향한 한 여인의 이야기로만 보시면 안 됩니다. 내 이야기,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살리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핍박하고 비난하고 모멸감을 주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 모든 비난과 핍박을 참아내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 아버지이신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자녀를 위해 어떤 모멸감도 감내할 수 있는 어머니처럼, 우리를 위해서라면 그 모든 모욕을 다 참아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어버이들이신 여러분, 또는 어버이가 되실 여러분. 부모님을 통해 받은 사랑을 너무 쉽게 잊고 삽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은 아예 떠올리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버이나 자녀들입니다만, 그 이전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 분의 자녀입니다. 오늘 이 여인의 딸을 향한 애틋한 사랑을 통해 우리의 부모님들의 사랑을 귀히 여김과 동시에, 우리를 향해 영원한 사랑을 보여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며 살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021년 5월 2일 / 부활절 제5주 & 어린이주일


하나님나라와 어린아이

(마가복음 10장 13-16절)


 

     5월의 첫 주일, 어린이주일입니다. 성경에 있는 절기는 아니지만 지키며 기억해야 할 주일입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아 마가복음 10장에 등장하는 짧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을 대하셨던 방식과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신 말씀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며, 어린아이들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 봅니다.

     오늘 말씀을 이런 질문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1.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예수님께 오게 되었습니까?
     어린아이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계신 현장으로 어른들에 의해 아이들이 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 기적 이야기를 들은 많은 어른들이 예수님이 만져 주시길 바라며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렇게 데려온 어른들과는 달리, 또다른 어른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어른들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까지도 귀찮아하며 꾸짖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어린아이들을 대하는 어른들의 모습과도 그리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해 어른들의 의사에 따라 움직여야 하지만 어린아이들도 모두 소중하게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을 데려 온 어른들과 그 어린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어른들 모두가 어린아이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2. 예수님께서 화를 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자 제자들이 꾸짖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태도에 예수님은 화를 내십니다. 자신들 중 누가 더 높은 사람인지 다투고 있던 제자들 가운데에 권력도 관심도 힘도 없는 한 아이를 세우시고는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말씀은 있는 그대로 귀히 여기며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데려온 어른들은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을 만져 주기만을 바랐지만 예수님은 어린아이들 한 사람씩을 안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어린아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 이야기를 꺼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말씀으로 이어갑니다. 어린아이들을 꾸짖는 제자들의 태도만 언급하셔도 될 것 같은데 하나님나라와 어린아이를 연관시킨 이유는, 어린아이를 통해 하나님나라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본질과 목적과 방향과 태도에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나라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나라입니다.
또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당대의 사고와 습관과 자신들의 삶을 뛰어넘지 못하고 어린아이들을 함부로 대하며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린아이 같아야 들어가는 나라는 하나님께 속해 하나님의 언어를 쓰는 나라입니다. 생명이 생명으로 존중되는 나라입니다. 여러분이 속한 나라는 어떻습니까? 어린아이 같은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여러분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하나님나라를 보여주고 계십니까?
     어린이 주일, 어린이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설교는 못했지만, 어린이들을 보고 만나고 키우신다면, 그들에게 하나님나라가 열려 있음을 기억하시고 귀히 여겨 그들을 닮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4월 24일 / 부활절 제4주


'에바다'되어야 산다

(마가복음 7장 31-37절)


 

     마가복음 말씀을 몇 주간 읽어가며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나누고 있습니다. 귀신을 쫓고 질병을 고친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계속 강조하는 것은 단순한 기적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적만 맛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아 삶의 변화까지 맛보는 경험을 말합니다.
     오늘도 치유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의 이방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오셔 한 사람을 만납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데리고 온 사람으로 청각 장애가 있었습니다. 또 듣지를 못하니 말도 못했습니다. 데리고 온 사람들은 예수님이 손으로 얹기만 해도 나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복잡하게 일을 하십니다. 데려온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신 다음, 예수님의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어 손으로 그의 혀에 갖다 대신 후,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고 ‘에바다’라고 외치십니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렸습니다.
     여기서 핵심 단어인 ‘에바다’를 기억해야 합니다. 원래 뜻은 ‘열려져라, 열려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에바다’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닫힌 것은 열리고 묶인 것이 풀렸습니다. 열려지는 일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기다렸던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소망이고 약속입니다. 예수께서 메시야로 오셨으니 그 일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에바다’라고 하시며 하늘을 보며 탄식을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지 못해 나온 탄식입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도 이렇게 예수님의 탄식이 흘러 나오는 삶을 살아갑니다. 왜 예수님이 탄식을 하셨을까? 이것은 못 듣고, 못 보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눈은 보라고 있고, 귀는 들으라고 있고, 입은 말하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 구원 받지 못하고 있으니 탄식해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신체적으로 시각이 살아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보는 게 아닙니다. ‘에바다’ 해야 볼 수 있습니다. ‘에바다’ 하지 않으며, ‘에바다’ 되지 않으면 여전히 어둠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렇게 다짐합니다.